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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속으로 - 김성식> 유로존의 경제학과 정치학
설계 결함 드러낸 유로존
드라기 처방도 연명책 불과
부채경제 위기 경제적 논란
갈등 가득찬 정치영역으로…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유로존 17개국의 조달금리가 너무 달라서 ECB가 단일통화 정책을 구사하는데 방해된다”고 주장했다. 지난 9월 6일 재정위기국 3년 이내 국채의 무제한 매입 조치를 발표하면서, 반대자를 의식하며 덧붙인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유로화가 이미 단일통화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2002년 유로존이 정식 출범한 이후 상당기간 봄날이 지속되었다. 각국의 국채금리(수익률)는 큰 차이 없이 독일 수준으로 낮게 수렴되었고, 환율은 평균치로 고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경쟁력이 높은 독일은 평가절하의 혜택을 누렸고, PIIGS는 민간이든 정부든 저비용 부채 경제에 앞다투어 승차했다. 약한 고리부터 누적된 거품의 압력이 쏠리고 리스크는 정부 계정으로 옮아갔으며, 유로존 국가들의 국채금리는 본래의 건강 정도에 따라 차별화되었다.

올해 6월 EU 정상회담에서 유럽안정기금의 스페인 은행 직접 지원, 1200억 유로 규모의 성장 촉진 자금 투여 등이 결정된 이후에도 스페인과 이태리의 국채금리는 7% 언저리였고 그리스는 20%선을 상회했다. ECB의 최종 대부자 기능을 동원하는 드라기의 9ㆍ6 조치 발표 이후 재정취약국의 국채금리 수준이 다소 낮아지긴 했지만 2%대인 독일과의 격차는 해소될 수 없다. 동일 화폐권역 내에서 이처럼 국채금리의 큰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은 유로화가 무위험자산(risk free asset)을 생성할 기능을 멈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적 통화지역 이론’에 따르면, 첫째는 국가 간 경제구조의 유사성, 둘째는 역내의 자유로운 노동 및 자본 이동, 셋째는 재정이전 등을 통한 자원 배분 등을 요건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유로존은 설계 결함을 드러냈다. 남유럽 입장에서 보면 고부가가치 상품은 독일에게, 값싼 공산품은 중국에게 시장을 빼앗겼다. 언어장벽과 사회적 갈등은 역내의 노동 이동을 미미한 수준으로 제한했다. 재정통합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다. 유럽안정메카니즘(ESM) 설립을 놓고도 헌법재판을 치러야 하는 독일의 입장에서는 총리의 목이 서너 개라도 모자른다는 이야기다.

독일 분데스방크 총재의 저항을 누르고 의결된 ‘슈퍼 마리오’의 처방도 문제해결책이 아니라 연명책에 불과하다. 이행 과정마다 지뢰가 널려있고 차후 치료비 분담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다. 특히 각국 내부의 정치와 유럽국가 간 정치는 간단치가 않다. 네덜란드ㆍ이태리(내년 4월) 등 각국의 선거 일정은 반(反)EU 정서를 자극하는 좌우 급진정치의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유로존 앞날에 열쇠를 쥐고 있는 독일은 내년 가을이 총선이다. 적어도 그 때까지는 ‘땜질처방-숨고르기-위기재연-땜질처방’이 반복될 것이다. 한편 미국도 연말 대선을 앞두고 재정절벽(fiscal cliff) 현실화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본질적으로 부채 경제의 위기인 글로벌 금융위기를 둘러싼 경제적 논란은 이미 갈등으로 가득찬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간 지 오래됐다.

우리는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 민간은 시나리오 하나하나에 촉각을 세워야겠지만 국가는 다르다. 유로존의 기능장애 및 치료기간의 장기화를 기정사실로 하고 재정과 금리 등 거시정책은 실탄을 아껴 경기대응(countercy clical) 여력을 확보하며 외환 및 금융의 안정성 확보에 눈을 부릅떠야 한다. 단기 외채의 장기화, 물건되는 해외 급매물과 사업의 예리한 포착 등 기회를 활용하는 외화 표시 부채 및 자산의 관리도 중요하다. 적어도 차기 5년의 전반부는 불확실성과 갈등의 늪지대다. 과연 우리 정치는 꿈과 인내를 국민과 공유하며 잘 건너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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