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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읽기 - 정재욱> 여유와 품위의 정치 그리 어렵나
정치인의 말은 방향과 내용에 공감이 가더라도 표현이 저급하면 국민들은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정치판에 막말이 난무하는 것은 그만큼 여유와 자신감이 없다는 반증이다.


올 대선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난무하는 정치권 인사들의 천박한 언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만큼 지청구를 들었으면 품격은 고사하고 적어도 상스러운 막말은 그만 할 때도 됐을 법한데, 그게 그리 어려운 모양이다. 국민들을 얼마나 얕잡아보면 이렇게 말을 함부로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여야 가릴 것 없지만 아무래도 방어하는 여당보다 공격하는 야당 쪽이 조금은 더 심해 보인다. 들춰보자면 한이 없겠지만 당장 눈에 띄는 것은 최근 정수장학회 지분 매각 논란과 관련, ‘아버지가 훔치고 딸이 팔아먹는다’는 식의 증오심을 자극하는 민주당의 막말 공세다.

이렇게 내쏘면 상대방 표는 떨어지고 그게 내게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유치한 발상이며 오산이다. 방향과 내용에 아무리 공감이 가더라도 표현이 저급하면 국민들은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지난 4월 총선에서 나꼼수의 김용민이 낙마하고, 그 여파가 야권의 패배로 이어진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인기 탤런트 출신의 최종원 전 의원이 막말 퍼레이드로 주목을 받아보려다 지역구 예비경선조차 통과하지 못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직접 지칭해 ‘그년’ 표현으로 물의를 일으킨 이종걸 의원은 자숙하기는커녕 문재인 후보 직속의 한 위원회까지 맡았다. 제윤경 공동선대위원장은 여권을 향해 ‘도둑놈’ ‘기생충’ ‘사이코패스’… 등의 그야말로 막말 종합세트를 쏟아냈다. 선대위에 관계하기 전의 일이라지만 이런 수준의 사람들이 대사를 도모한다니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여권이라고 다를 건 없다. 새누리당 대변인으로 내정된 김재원 의원은 백주에 ‘이××, 저××’ 하다 망신을 샀고, 박 후보 캠프의 핵심인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은 “입을 봉해야 한다”는 상식 이하의 표현을 서슴지 않아 구설에 올랐다.

하긴 남기춘 클린정치위원장은 박 후보의 올케인 서향희 변호사를 지칭하며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그냥 가만히 처박혀 있는 게 낫다”는 소리까지 했다. 이들이 집권을 운운하고 클린 정치를 한다고 거들먹거리니 지나가는 소도 웃을 일이다.

우리 정치판이 조금은 더 여유와 품격이 있었으면 한다. 정치판에 공격적이고 감정적인 말들이 끊이지 않고 설화(舌禍)가 잦은 것은 여유가 없다는 반증이다. 여유의 부재는 자신감의 결여에서 비롯된다.

1970년대 초반 당시 야당인 신민당을 이끌던 유진산은 당권 경쟁 라이벌인 정일형의 공세에 “당나귀는 버드나무 아래 묶여 있어야 안전하다”고 한 방 먹였다. 당나귀는 정일형의 정(鄭)을, 버드나무는 유진산의 유(柳)를 빗댄 말이다.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자신을 ‘서산에 지는 해’라며 깎아내리는 반대 세력을 향해 “태양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일몰이다. 서산을 벌겋게 물들이겠다”고 반박했다. 촌철살인 날카로움 속에 해학과 여유가 묻어난다.

1984년 미국 대통령으로 재선에 나선 73세의 레이건은 TV토론에서 56세인 민주당 먼데일 후보로부터 ‘대통령의 나이’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레이건은 단호하게 “당신이 젊고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고 맞받았다. 시청자들은 박장대소했고, 먼데일도 웃고 말았다.

이런 자신감과 여유를 우리 정치판에서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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