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욕(辱)’은 ‘별 진(辰)’과 ‘마디 촌(寸)’으로 이뤄졌다. 별은 ‘새벽’ ‘아침’과 통한다. 옛 자료를 보면 ‘진’은 농기구를 그린 글자다. ‘농사 농(農)’자에도 들어 있다. 촌은 지사문자(指事文字)로 손을 뜻한다. ‘한 촌’은 손끝에서 손목까지 길이다. 촌이 부수로 쓰이면 주로 손과 관련된다. 욕은 밭일하는 모습을 그린 글자다. 본래 ‘풀을 베다’ ‘일을 한다’는 뜻에서 ‘일이 고되다’로 넓혀져 ‘욕되다’나 ‘더럽히다’는 의미를 가지게 됐다. 경상도에서 “욕봤다”는 ‘수고(受苦) 많았다’는 뜻이다.
지난해에는 연초 1.8%였던 국고채 3년물 금리가 한때 4.5%를 넘을 정도로 이자율이 급등했다. 엄청난 가계부채를 가진 우리 경제에 큰 부담이 됐다. 어려웠지만 아주 큰 탈은 없었다. 새해 들어 이자 부담이 지금보다 더 무거워지지 않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연착륙이 중요하다.
우리 국민은 비교적 약속과 질서를 잘 지킨다. 외환위기나 신용카드 사태 때 빚을 못 갚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후 채무재조정 등을 통해 상당 부분 상환이 이뤄졌다. 사정이 어려워 못 갚는 경우는 있어도 작정하고 떼어 먹을 생각에 돈을 빌리는 이들은 드물었다.
금융당국 역할도 중요했다. 특히 2021년 고승범 금융위원장과 최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행보는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지난 정부 임기가 채 10달도 남지 않은 때 취임한 고 위원장은 은행마다 한도를 정해 그 이상은 대출하지 못하도록 했다. 최선은 아니었지만 최악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돈 빌리기 어려워진 이들의 불만이 폭주했다. 두 자릿수까지 치솟던 가계대출 증가율이 이때부터 빠르게 둔화된다. 금리가 오를 때 꼭 필요한 차입축소(deleveraging)다. 당시 대출 증가 추세를 누르지 못했다면 지난해 가계의 고금리 부담은 훨씬 더 무거워졌을 것이다. 정권 말 장관이 ‘욕’을 감수한 덕분이다.
검사 출신인 이복현 금감원장은 윤석열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취임 초부터 ‘실세’로 관심이 컸다. 지난해 10월 ‘레고랜드 사태’로 자금시장이 얼어붙자 그 역시 시험대에 올랐다. 그가 취임하며 주목한 ‘그림자 금융’, 즉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서 문제가 터졌기 때문이다. 당국에 대한 비난이 폭주했다. 문제 해결 과정에서 금감원이 흥국생명 영구채 조기 상환을 이끌어낸 것이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석 달여가 지난 지금 여전히 불안은 남았지만 회사채시장이 그때보다 훨씬 안정됐다.
최근에는 금융당국의 수신금리를 통제로 은행들만 과도한 예대마진을 거둔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 원장은 은행장들을 만났고 이후 은행들의 대출금리 인하가 이어지고 있다.
춘추시대 정(鄭)나라 재상 자산(子産)은 공자가 당대에 가장 존경한 인물이다. 그는 중국 최초로 성문법(成文法)을 도입했다. 그의 ‘낯선’ 법치에 백성들은 크게 반발해 노래까지 만들어 저주했다. 하지만 수년 후 자산의 법치는 큰 효과를 보고 백성은 자산을 칭송한다.
웬만해서 공직자가 한 일을 칭찬하기는 쉽지 않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수도 있다. 아직 어려움은 끝나지 않았다. 새해에도 당국자들이 해야 할 일은 많다.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문제 해결에 애를 썼다면 격려 정도는 해줘야 앞으로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칭찬까지는 몰라도 “욕봤다”는 말 정도는 해주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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