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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포커스] ‘악마의 유혹’과 급발진 사고

저명한 법경제학자이자 미 연방 법관을 역임한 예일대 귀도 캘러브레이지(Guido Calabresi) 교수는 자동차를 ‘악마의 선물’에 비유한 적이 있다. 자동차는 현대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문명의 이기(利器)지만 재미있고 스릴감 넘칠수록 더 많은 생명을 담보하는 악마의 유혹이라는 것이다. 뉴스를 통해 종종 접하게 되는 자동차 급발진 사고 소식도 이러한 비유로부터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관용차의 급발진에 따른 모 대법관의 부상 사고, 유명 탤런트가 탄 고급 승용차의 급발진에 의한 동승 가족의 사망 사고, 고속도로 운전 중 급발진성 사고로 부부가 사망한 사건 등 급발진 관련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한국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급발진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자동차 사고가 지난 6년간 한 해 평균 40여건이나 발생했다고 한다.

급발진은 자동변속기가 장착된 차량이 서 있거나 진행 중에 갑자기 급가속되는 현상을 말한다. 엑셀을 끝까지 밟은 것처럼 엔진 RPM이 급상승하며 차량이 돌진하는 것이다. 이러한 급발진 상황에서 운전자는 공황 상태에 빠져 제대로 대처하기 힘들다. 1980년대 초 미국에서 처음 법정 논쟁까지 가서 세계적으로 알려졌지만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요인이 추정될 뿐 속 시원히 알려진 것이 없다.

우리나라의 관련 소송에서는 차량의 결함 때문에 급발진이 발생했다는 피해자 측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피고 측 주장인 운전자의 조작 미숙이라고 결론짓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하나 둘이 아니다. 많은 운전자가 급발진 사고의 원인이 차체의 설계나 제조 과정에서의 결함이라고 의심하고 있으나 그 누구도 정확한 원인을 입증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현실에서 급발진으로 추정되는 사고의 원인을 운전자가 아니라 차량을 제조·판매한 회사가 입증해야 한다는 매우 의미 있는 판결이 있었다. 지난 2020년 11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12부는 1심의 판결을 뒤집고 “자동차의 결함으로 인한 사고로 판단된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했다. 해당 판결은 민법 제750조의 과실책임 법리(negligence rule)에 따라 운전자가 자신의 과실 없음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기존의 대법원 판례를 처음으로 뒤집은 것이어서 피고 측 항고에 따른 최종심 결과가 주목된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은 이미 1990년대 후반부터 급발진 사고에 관련된 소송에서 ‘차체 결함이 없음’을 제조사가 입증하도록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입증 책임이 소비자가 아닌 자동차 회사에 있다는 판결이 지난 2001년에 1건 있었으나 당시 업체의 즉각적인 항소로 인정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이번 판결이 미국과 같이 입증 책임이 소비자에게서 제조사로 상당 부분 전환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그동안 사고를 당하고도 적절한 배상을 받지 못했던 소비자의 억울함과 혹시나 자신도 급발진 사고를 당해 ‘악마의 유혹’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소비자의 불안이 해소되는 한편 자동차회사들도 급발진 사고 방지를 위한 안전 시스템 구축으로 자동차가 더 안전해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이종인 여의도연구원 경제정책2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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