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1990년대 초만 해도 국내에선 일등 기업이지만 선진국에선 찬밥 신세였다. 제품의 질과 디자인이 한참 뒤처졌기 때문이다. 생산 라인에선 불량 부품을 칼로 깎아 억지로 끼워맞추는 일이 흔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이런 삼성전자를 ‘이미 망한 회사’ ‘2류 기업’이라며 혹독하게 깎아내렸다. 선진국과 일본 기술을 모방하는 데에만 급급해 세계 시장에서 ‘싸구려’ 취급을 받는다며,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몰아쳤다.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이 나온 배경이다. 이 회장이 극단적인 표현까지 써 호통친 것은 그만큼 상황이 심각했다는 의미다.
삼성은 이후 ‘품질경영’과 ‘초격차 투자’를 혁신의 바퀴 삼아 1993년 41조원이던 자산이 2022년 448조원으로, 매출(연결 기준)은 같은 기간 28조6847억원에서 302조2314억원으로 각각 10배 넘게 불렸다. 삼성전자의 브랜드가치는 세계 5위(887억달러)로, 도요타(598억달러), 코카콜라(575억달러), 나이키(503억달러) 등에 앞선다. 시대를 읽고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절박감과 모든 책임을 지고 변화를 진두지휘한 기업가정신이 삼성을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키운 것이다.
삼성의 신경영 선언이 나온 지 30년이 되는 지금, 경영 환경은 더 나빠졌다. 글로벌 기술 패권전쟁과 각국의 경쟁적인 기술개발, 경기 둔화 등 위기감이 크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에서 반도체, 2차전지, 전기차 등 우리 경쟁 산업은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게 현실이다.
이런 복합 위기를 돌파하려면 더 빠른 변화와 혁신밖에 없다. 초스피드 시대에 변화의 흐름에 올라타려면 기존의 관행적인 경영과 체질을 바꿔야 한다. 창조적 파괴와 혁신의 기업가정신이 요구되는 이유다.
마침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범정부 ‘서비스산업발전 태스크포스(TF)’회의에서 이병철 삼성, 구인회 LG, 허만정 GS, 조홍제 효성 그룹의 창업주 생가를 관광 코스로 개발하겠다고 했다. 산업화를 이끈 이들의 기업가정신을 국민이 자랑스럽게 돌아볼 수 있게 하겠다는 취지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기업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제대로 공을 평가해주지 않은 것이다. 국가경쟁력이 기업경쟁력이기도 한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기업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지속적인 혁신을 통해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성장을 견인하는 것은 기업의 몫이다. 규제를 풀어 기업이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정부의 책무도 중요하다. 신경영 선언 30년이 주는 교훈을 되새겨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