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란 용어가 있다. 사전적으로 ‘미국은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독특하고 특별하다’는 뜻이다. 프랑스 정치인이자 철학자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이 1835년에 발간한 ‘미국의 민주주의(De la democratie en Amerique)’에서 언급한 말이다. 왕정이 대부분이던 당시 유럽과 달리 완전한 공화정과 지방자치를 구현한 미국의 정치와 행정에 대해 연구한 고전 중의 고전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 백미(白眉)다.
20세기 들어 미국이 세계 패권(hegemony)을 차지하면서 보수 진영인 공화당은 ‘미국 예외주의’를 ‘미국 제일주의’로 윤색했다. 보통 이 같은 우월주의는 좋을 때보다 어려울 때 많은 호응을 받기 마련이다.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독일이 어려울 때 아돌프 히틀러도 ‘아리아인 우월주의’를 내세워 집권했다. 소련 붕괴 이후 단일 패권을 누리던 미국에서 ‘미국 예외주의’가 다시 부상한 것은 2016년 대통령선거 때다. 힐러리 클린턴을 꺾은 도널드 트럼프는 2017년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미국 우월주의(America First)’를 공언했다.
중국이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할 때만 해도 미국 중심의 글로벌 표준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였다. WTO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과 함께 1944년 브레턴우즈(Bretton Woods) 체제에서 만들어진 미국 중심의 글로벌 경제질서의 핵심이다. 1990년 덩샤오핑(鄧小平) 사망 이후 10년 단위로 지도자가 바뀌며 독재에서도 벗어나는 듯했다. 하지만 2012년 집권한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일대일로(一 一路)’ 정책으로 패권 추구 의지를 드러낸다. 홍콩 직접 통제에 이어 대만 병합 의지도 감추지 않았다.
시 주석의 ‘중국몽(中 )’은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잃었던 패권을 되찾는다는, 일종의 ‘중국 제일주의(chinese exceptionalism)’다. 시 주석의 장기 집권이 명분을 얻으려면 홍콩에 이어 대만까지 수복(?)하는 ‘천하통일’을 이뤄야 한다. 대만은 경제적으로는 세계 반도체산업의 핵심이고 군사적으로는 중국의 대양(大洋) 진출을 막는 장애물이다. 미국으로서는 중국을 막기 위해 꼭 지켜야 할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여러 차례 도전을 받았지만 위기를 기회로 바꾸며 질서를 재편하고 패권을 유지했다. 1970년대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원유를 수입하고 있었다. 중동으로 달러가 쏠렸다. 중동전쟁과 석유파동(oil-shock)으로 자원무기화의 위력을 맛본 미국은 국제 원자재 결제통화를 달러로 제한한다. 산유국의 오일달러도 결국 미국의 통제를 받게 됐다. 미국은 중동 정치에도 적극 개입했다. 1980년대 미국 대외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이 중동이었던 이유다. 이후 전 세계 금융시장에서 오일달러가 큰손으로 부상했지만 국제정치무대에서는 큰 힘을 갖지 못했다. 중동 정세도, 달러 가치도 결국 미국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중동 다음으로 미국을 위협한 곳은 1980년 세계 2위와 3위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일본과 독일이다. 월남전쟁 패배와 2차 오일쇼크로 스태그플레이션에 직면한 미국은 1980년대 초고강도 긴축을 단행했다. 그 여파로 달러 가치가 급등했고 무역 적자는 급증했다. 미국 제조업도 경쟁력을 잃었다. 레이건 정부는 1985년 9월 미국 뉴욕 플라자호텔에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와 달러화 가치를 낮출 것을 제안했다. 각국 화폐 가치를 높여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라는 강제였다. 냉전 시대에 미국에 안보를 기대고 있던 4개국은 이를 거부할 힘이 없었다.
플라자 합의 이후 독일은 통일을 통해 동유럽권으로 경제 영역을 확장하고 유로 체제를 구축한다.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약한 나라와 화폐를 통합하면서 독일은 사실상 반영구적인 통화 약세 효과를 누리게 된다. 반면 일본은 엔화 강세에 짓눌려 좀처럼 제조업 경쟁력을 회복하지 못하면서 ‘잃어버린 30년’을 겪는다. 이후 1990년대 미국 경제는 금융위기 전까지 사상 유례없는 장기 호황을 누린다.
2008년 금융위기는 미국 내부의 문제에서 비롯됐지만 달러가 기축통화인 까닭에 세계의 위기가 됐다. 다른 나라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함께 위기를 겪어야 했고, 모두 미국의 연방준비제도(Fed)에 매달렸다. 미국은 달러를 더 찍어서 전 세계에 풀었다. 보통의 국가라면 경제가 어렵다고 통화량을 늘리게 되면 초(hyper)인플레이션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미국은 빚으로 빚을 막아내는 ‘마법’을 부린다.
기축통화국은 무역수지 적자를 통해 전 세계에 통화를 공급해야 한다. 너무 많으면 그 가치가 하락해 국내 물가 상승을 자극할 수 있지만 반대로 너무 적으면 그만큼 이용도 위축돼 기축통화 역할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 일명 ‘트리핀(triffin) 딜레마’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달러 발행을 천문학적으로 늘렸지만 최근까지 이렇다 할 인플레이션을 겪지 않았다. 세계화로 공산품 가격이 안정화된 덕도 봤지만 주요국이 미국에서 거둔 무역 흑자로 다시 미국 채권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생산이 늘며 원자재와 식량, 금융시장의 유동성 안정을 위한 달러 수요도 계속 강해졌다. 특히 인터넷, 모바일 서비스, 인공지능(AI), 로봇, 우주 분야 등 21세 혁신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이뤄지면서 자본이 집중됐다. 달러의 힘이 강해지면서 연방준비제도(Fed)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부작용도 드러났다. 소비와 금융으로 경제의 중심이 기울어 중산층이 얇아지고 양극화가 심화됐다. 이는 정치적 양극화로 이어지며 미국 정계에 새로운 화두를 던지게 된다.
2016년 대통령선거에서 트럼프에 패한 민주당은 충격에 빠진다. 비록 4년 뒤인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트럼프를 꺾지만 최근 하원에서 다수당 지위를 잃을 정도로 민주당의 인기는 많지 않다. 클린턴이나 오바마처럼 재임 중 지지율이 높지 않은 바이든 대통령이 내년에 다시 트럼프를 이길지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민주당으로서는 필승 전략이 필요하다.
중국의 부상으로 미국 제조업이 경쟁력을 잃으면서 민주당의 핵심 지지 기반인 중산층 근로자들의 사정이 어려워졌다. 민주당이 시장경제와 자유무역을 추구했지만 중국은 그 틈을 타 계획경제와 보호무역으로 미국 경제를 잠식했다. 중국 국내총생산(GDP)은 2007년 독일, 2010년 일본을 넘어섰다. 2014년에는 일본과 독일을 합친 것보다 커졌고 2021년에는 미국의 76% 수준까지 올랐다. 미국 추월은 시간문제라는 관측까지 나올 정도가 됐다. 특히 코로나19로 공급망 교란이 확인되면서 세계 경제의 중국에 대한 높은 의존은 새로운 위험 요인이 됐다. 민주당 정부는 미국 경제 정책의 핵심을 효율에서 안보로 전환한다.
러시아에 천연가스 공급을 의존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겪게 된 유럽의 사례도 ‘경제를 안보로 봐야 한다’는 미국의 확신을 더욱 단단하게 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은 천연가스 상당 부분을 미국에서 수입하게 됐다. 1980년대에도 소련은 중동 진출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지만 원유 수출로 회복했던 경제력이 소진되며 결국 연방이 무너진다. 당시 미국은 군대 파견 없이 반군이던 탈레반에 무기만 지원해 소련의 힘을 뺐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미국은 경제 제재와 무기 지원으로만 러시아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고갈시키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중국에 맞선 미국의 대응은 아이러니하게 계획경제와 보호무역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 규제로 중국을 압박한 데 이어 바이든 행정부는 핵심 산업을 지원해 미국의 제조업 경쟁력을 다시 높이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제조업을 중국에 의지했다가 자칫 종속될 위험을 막기 위해서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법 등은 미국 의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됐다.
미국과 중국의 승부는 아직 쉽게 그 끝을 예단하기 어렵다. 당장에는 미국이 거의 모든 면에서 중국에 앞선다. 군사력은 물론 기술력 우위가 확실하고 기축통화인 달러의 힘도 막강하다. 혁신이 이어지며 외부 인재와 인구의 유입도 계속되고 있다. 반면 중국은 첨단 기술에서 뚜렷하게 열세인 데다 인구고령화까지 빠르게 진행 중이다. 특히 연금제도가 미비해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재정 악화와 소비 부진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코로나19 방역 해제 이후에도 최근 중국 경제가 이렇다 할 반등을 보여주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일방적 우위에서 비롯되는 미국의 일방적 행보가 오히려 중국에는 반미(反美) 연대를 통해 반격할 기회가 되기도 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미국의 통화 긴축은 다른 나라들의 물가 압력을 높였다. 중국을 압박하기 위한 무역 규제는 다른 나라들의 이해를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어서다. 중국은 세계 2위 소비시장이자 주요 국제 원자재를 공급해주는 국가이기도 하다. 미국의 견제로 중국 시장이 막히면 피해를 보는 나라들이 상당하다.
중동은 물론 인도, 브라질 등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에서는 반미 성향이 짙어지고 있다. 중동은 셰일가스 개발 이후 원유시장 경쟁국이 된 미국보다 세계 최대 원유수입국인 중국과 가까워지는 모습이다. 특히 중국의 위안화 국제화에 중동국가들이 호응하면서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상을 뒷받침해주는 패트로달러(petro dollar) 체제에도 균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중국과의 무역 비중이 큰 브라질이나 오랜 제3세계 주도국인 인도 역시 미국의 일방 행보에는 불만이다. 서유럽도 중국과의 경제 협력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려는 의지가 뚜렷하다. 미국과 중국의 대결이 한창일 때도 프랑스, 독일 등은 중국과의 정상외교를 이어갔다.
심지어 미국 내에서도 ‘중국과의 극단적인 대결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여전히 미국의 다국적 기업 상당수가 중국 내 생산시설이나 소비에 의존하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는 자국산 소비 열풍이 뜨겁다.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면서 중국의 공산품 제조기술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높아졌다.
2차전지와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자원 상당수가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점도 미국의 약점이다. 중국을 대체할 곳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경제적 단절이 빠르게 진행되거나 군사적 충돌이 벌어진다면 미국이 입을 타격도 상당할 수밖에 없다. 중국을 세계 경제에서 분리(de-coupling)하기보다는 위험만 제거(de-risk)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는 이유다.
최근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등의 기업인이 중국을 방문했다. 블링컨 국무장관도 중국을 방문해 시 주석을 만났다. 연내 미·중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도 커졌다. 하지만 정상회담이 이뤄진다고 해도 미·중의 긴장관계가 해소될 것이라고 기대하면 오산이다. 시 주석의 집권이 계속되고 두 나라 모두 계속 패권을 추구하는 한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패권의 충돌과 그 과정에서 형성될 새로운 질서에 어떻게 적응할지 깊이 고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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