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억 규모의 ‘세기의 경매’로 꼽힌 록펠러 컬렉션. 앙리 마티스의 ‘목련 옆의 오달리스크’가 약 870억 원에 판매됐다. 이로 인해 마티스 작품 가운데 최고 낙찰 기록을 경신했다. [EPA] |
앙리 마티스. [게티이미지] |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지난 글에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가 그의 나이 40대에 ‘야수파의 리더’로 자리매김하게 된 작품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전통적인 법칙을 거부하고 색을 자유롭게 해방한 마티스는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가 대놓고 질투한 아방가르드 선구자였죠. 이를 보여주는 마티스의 대표 작품이 ‘생의 기쁨’이었는데요. (▶지난기사 법학도 때려치고 쓱쓱…근데 피카소가 대놓고 질투한 라이벌요? [0.1초 그 사이])
그런 마티스가 그린 그림으로 현재까지 최고 낙찰가를 기록한 작품은 ‘목련 옆의 오달리스크’입니다. 마티스를 대표하는 다른 작품과 비교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 그림인데요. 데이비드 록펠러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열린 2018년 자선경매에서 이 작품은 무려 약 870억 원에 낙찰됩니다. (이 금액은 최근 영화 ‘파묘’, ‘범죄도시4’가 CJ CGV에 가져온 직·간접적인 매출과 비슷합니다.)
데이비드는 미국 최초의 갑부인 ‘석유왕’ 존 록펠러의 손자인데요. 그는 이 그림을 평생 거실에 걸어두고 감상했다고 전해집니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는 ‘큰손’ 미술 컬렉터가 애착을 가진 그림이었다고 하니, 그 자체로 작품 값은 뛸 수밖에요. (작품 값을 결정하는 요소에는 작품 소장자의 명성도 포함되기 때문이죠.)
앙리 마티스, 목련 옆의 오달리스크, 1922년. [크리스티] |
이 작품은 마티스가 ‘니스 시절’에 그린 그림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마티스의 나이 53세.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영감을 얻은 마티스는 프랑스 니스에서 새로운 화풍을 처음으로 선보입니다. 당초 마티스는 신선한 공기가 기관지염에 도움이 된다는 의사의 권유로 프랑스 망통으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망통까지 가지 않고 니스에 주저앉습니다. 찬란하게 맑은 햇살, 아름답게 반짝이는 해변,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온화한 기후까지. 지중해의 보석으로 꼽히는 니스의 자연은 그를 떨치기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게 만들었기 때문이죠. 실제로 마티스가 37년간 니스에서 살면서 그린 그림에는 느슨하게 드러나는 심미적 분위기가 두드러집니다. 이전 작품과 크게 비교되는 지점이기도 하고요.
“내가 꿈꾸는 미술이란 아무런 걱정 없이 편안하게 머리를 눕힐 수 있는 안락의자 같은 작품이다.”
앙리 마티스가 거주한 1922년 프랑스 니스 전경. [게티이미지] |
마티스가 추구한 예술세계가 조화롭게 담긴 작품이 바로 니스에서 그린 오달리스크 연작입니다. 이전까지 마티스에게 ‘파리의 삶’은 그를 무겁게 짓누르는 현실, 그 자체였거든요. 그는 마티스는 화가로서 성공하고 싶은 야망과 가족으로서 가장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감 사이에서 번뇌했던 것만 같습니다. 모자 가게까지 운영하며 가난한 화가인 마티스를 뒷바라지해 주고 그림 모델이 되어줄뿐만 아니라 어린 딸을 키워낸 이가 마티스의 아내 아멜리였는데요. 마티스는 그런 아내의 헌신에서조차 벗어나고 싶어했거든요. 어쩌면 가족마저도 그에게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티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예술이었거든요. 그는 그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뛰어넘고 싶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니스는 ‘영혼의 피신처’였습니다. “모든 게 거짓말 같고 참지 못할 정도로 매혹적이다.” 니스를 묘사한 마티스의 한 마디가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그가 꿈꾸던 모든 것이 담긴 그림이 이를 있는 그대로 말해주고 있고요.
앙리 마티스, 바이올린 케이스가 있는 실내, 1918-1919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 |
잠시 작품을 감상해 볼까요. 무엇보다 이때 그린 그의 그림에서는 부드럽고 완화된 색채의 음영이 두드러집니다. 여기에 동양적 장식과 조화를 이룬 매혹적인 여성의 모습이 드러나죠. 오달리스크는 튀르키예 황제 술탄의 밀실에서 시중을 들던 궁녀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19세기 초부터 수많은 프랑스 화가들은 ‘오리엔탈리즘’의 상징으로 오달리스크를 작품에 많이 다뤘는데요. 무엇보다 (사실상 첩을 의미하는) 여인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관능적인 시선이 오묘하죠. 그리고 여인의 자태는 어떤가요. 자신감 넘치는 포즈가 눈에 띄진 않으신지요. 마티스는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의 전형적인 오달리스크에서 탈피해, 이를 자신만의 시각 언어로 현대화했습니다.
“이 오달리스크를 들여다보라. 햇빛이 당당하고도 찬란하게 지배하고, 생채와 형태를 빨아들인다. 실내의 동양식 장식, 벽지와 바닥 카펫의 화려함, 관능적인 의상, 묵직하고 축 늘어진 인체의 관능성, 그들의 눈에 드리운 나른한 기대감, 아라베스크 무늬와 색채에 깃든 이 시에스타(낮잠 시간)의 온갖 근사함이 극한까지 추구됐다.”
앙리 마티스, 빨간 바지를 입은 오달리스크, 1924-1925년경.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 |
앙리 마티스, 장식적 배경 위에 장식적 인물, 1925-1926년. [파리 국립근대미술관(퐁피두센터)] |
마티스는 편협해져 버린 야수주의 이론을 계속 붙들지 않았습니다. 선과 색의 강렬한 표현으로 인해 사라졌던 공간의 깊이감과 풍부한 세부를 이 시기부터 다시 살려냈기 때문인데요. 이를 구현하기 위해 마티스는 니스의 호텔과 아파트를 임차해 거주한 방을 화실로 사용했습니다. 자연 속에서 그림을 그린 다른 인상주의 화가와 차별화되는 지점입니다. 그는 극장과 같은 장식과 가구와 조화를 이루는 빛을 집요하게 탐구했습니다. 발코니 창문으로 들어노는 나른한 햇살은 휴식이 필요한 마티스에게 엄청난 무기력을 선사했거든요. 이 시기에 그린 또다른 그림을 볼까요. ‘열린 창문을 등지고 앉아 있는 여인’ 작품이 대표적입니다.
앙리 마티스, 열린 창문을 등지고 앉아 있는 여인, 1922년. [몬트리올 미술관] |
“나는 지치고 스트레스를 받고 낙담한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평화와 고요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니스와 사랑에 빠진 마티스는 니스시에 자신의 작품을 기증하기에 이릅니다. 그렇게 마침내 1963년 문을 열게 된 마티스 미술관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죠.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님들의 마음의 안식처는 어디인가요. 인문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장소애(場所愛)’라는 단어로 인간이 장소에 대해 느끼는 사랑을 설명하는데요. 장소애가 깃든 여러분들의 그곳에서 잠재된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내보는 건 어떨까요. 마티스의 오달리스크를 한평생 소장했던 데이비드 록펠러는 마티스의 그림에서 분명 평안을 얻었던 것만 같습니다. 세기의 거장 마티스가 그림을 대하는 방식처럼 말이죠.
프랑스 니스에 위치한 마티스 미술관. [위키피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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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비싼 추상화 낙찰 기록을 가진 윌렘 드 쿠닝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지난 4월 개최된 아시아 최대 규모의 아트페어인 아트바젤 홍콩에서 가장 높은 가격에 판매된 작품도 그의 그림이죠.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맞춰 베니스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개막한 드 쿠닝의 전시도 놓칠 수 없고요. 그의 작품세계를 비롯한 그의 그림 이야기를 재밌게 전해드리겠습니다.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dsu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