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노동자 관련 상설전시관 개장했지만
‘강제동원’ 명시 없어…韓 “2015년 합의 유지”
유네스코 강제성 없어…日 이행의지에 기대야
韓정부 외교적 부담 커져…“日 후속조치 기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27일(현지시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회의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일본 니가타현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사진은 사도 광산 아이카와쓰루시 금은산(金銀山) 유적. [연합] |
[헤럴드경제=최은지 기자] 정부는 지난 27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에 대해 상설전시 공간 마련 및 매년 추도식 개최 등 일본 측의 선제적인 조치를 한일 간 협상을 통해 이끌어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 사실은 어디에도 기록하지 않아 또다시 상대국의 후속 조치에 기대할 수밖에 없어 한국 정부의 외교적 부담이 커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28일 아이카와 향토박물관 2층 D전시실 1구획에는 ‘조선반도(한반도의 일본식 표현) 출신자를 포함한 광산 노동자의 생활’이라는 제목의 상설전시 공간이 개장했다. 사도광산으로부터 약 2㎞에 떨어진 기타자와 부유 선광장 인근에 위치한 곳이다.
이곳에는 1519명 등 한국인 노동자 수가 기록된 문서가 전시돼있고 “1938년 4월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징용령으로 모집, 관 알선, 징용이 한반도에 도입됐다”며 조선총독부가 관여했다는 설명이 적혀있지만, 전시관 어디에도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로 동원됐다는 것을 명시하는 ‘강제동원’이나 ‘강제노역’ 등 문구는 없다.
2015년 군함도(하시마섬) 세계유산 등재 당시 일본 정부가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선에서 ‘강제로 노역’(Forced to work)을 했다고 명시해 강제성을 인정한 것과 대조적이다. 반면 2015년에는 등재 조건이었던 산업유산정보센터가 군함도와 1000㎞ 이상 떨어진 도쿄에 설치된 것과 달리 이번에는 사도광산 인근에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기록을 전시했다는 점이 다르다.
요미우리신문은 28일 “사도광산 등재를 두고 한·일 양국 정부가 한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노동자와 관련해 현지 전시시설에서 ‘강제노동’ 문구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당시의 생활상 등을 설명하는 것으로 사전에 의견을 모았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외교부는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했다. 외교부는 앞서 “일본이 분명히 2015년 합의를 포함해 모든 약속을 다 인정을 한 상태에서 이런 조치를 했다”고 설명했다. 강제성을 인정한 2015년의 문구가 사도광산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 고위 인사들도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환영하면서 강제노역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등재 결정 당일 “지역과 국민 여러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가 문화유산 등재라는 결과만을 강조하며 자축하는 모습에 한국 내 여론이 불편해하는 이유는 등재 추진 과정에서 보인 일본 정부의 태도 때문이다. 일본은 2023년 2월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가치를 에도시대(17~19세기)에 한정해 신청서를 제출해 조선인 노동자 강제동원 시기(20세기)를 제외해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의 지적을 받았다. 애초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전쟁 범죄의 역사를 삭제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은 것이다.
특히 지난 2015년 군함도(하시마섬)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시 ‘전체 역사를 기술하라’는 세계유산위원회(WHC)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아 외교적 논란이 일었던 전례가 있다. 우익 성향의 산케이신문은 사설을 통해 ‘사도광산 조선인 노동자 전시는 불필요하다’고 주장했고, 일본 정부 관계자는 이 언론에 “강제노동이 아니라는 정부의 기존 입장을 바꾼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WHC 권고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와 달리 강제조항이 아니다.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을 적시하지 않은 점에 대해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는 WHC 회의 당시 가노 다케히로 주유네스코 일본대사의 발언이 결정문의 각주로 포함되기 때문에 결정문의 일부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가노 대사는 “정부는 그동안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채택된 모든 관련 결정과 이에 관한 일본의 약속들을 명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일본의 이행 의지’에 기댈 수밖에 없어 외교적 부담은 커졌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앞서 “일본이 미리 사도광산 현장에 설치한 전시물은 물론 추도식 등 관련 후속조치 이행에 있어 우리 정부와 긴밀히 소통하며 진정성 있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매년 7~8월 개최하는 사도광산 노동자들을 위한 추도식 일정과 정부 관계자 참석 범위 등을 협의해야 한다. 일본 측에서는 고위급 인사의 참석에 대해 부담을 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상설전시 공간도 보완하는 후속 조치가 남아있다. 외교부는 “현 전시들은 한일 합의가 마지막 순간에 이뤄져 급히 제작된 것으로, 조속히 더 좋은 재질의 전시물로 교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국은 지난해 WHC 신규 위원국에 당선돼 올해부터 2027년까지 위원국으로 활동, 최종 심사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에서 ‘반대’표를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