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상 서울문화재단 대표
소녀시대는 전세기를 타고 다니며 전 세계 공연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고, 빅뱅은 미국의 빌보드 차트에 올랐다고 한다. 대장금, 겨울연가 같은 한국 드라마가 중국과 일본, 동남아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며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다소 주춤해지자 한류는 이제 끝났다고 아쉬워하던 것이 오래지 않은데, 이번 바람은 그 정도를 훨씬 넘는 것 같다. 특정 드라마와 일부 스타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흐름이 여러 대중가수 그룹들의 힘으로 아시아권을 넘어 세계에서 사건을 만들고 있다.
일본 주부들이 한국말을 배우고 도시의 안내표지판에 한글이 등장하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됐다. 하루가 다르게 한국음식점과 막걸리 바가 늘어나고 감자탕집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일본의 사춘기 여학생들이 ‘서현’ ‘윤아’ 같은 한국어 예명을 갖고 싶어서 한국 출신 학생들에게 한국식 이름을 지어달라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
이뿐인가, 이제 바람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향하고 있다. K-Pop과 드라마가 중동을 경유해서 유럽 상륙을 준비하고 있다. 프랑스 한국문화원에서는 한국 관광을 앞두고 한국음식과 한글을 배우려는 신청자가 순서를 기다려서 교육을 받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 프랑스 국립 제2TV가 한국 특집 ‘코리안 웨이브’에서 한류를 집중 조명했다는 소식도 그래서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신나는 소식들이지만 이런 반응을 접할 때 나는 솔직히 조금 호들갑스럽다고 생각했다. 작은 사건을 가지고 흥분하는 것은 아닌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요즘의 현상들은 나의 조심성이 기우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문화예술 분야에서 30년 가까이 문화행정을 하면서 늘 서양 예술가의 소식에 더 귀를 기울였고, 어쩌다 들려오는 우리 예술가들의 선전은 일회성이거나 과장된 언론 플레이 아닐까 의심을 품곤 했다. 과거의 염려에 갇혀 사실 한류라는 큰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후회와 함께 공공 영역에서 이런 부분에 한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이 크게 다가왔다.
요즘 순수예술 분야에서는 또 다른 현상이 감지되고 있다. 최근 공연한 국립발레단의 ‘지젤’은 일찌감치 전 좌석이 매진돼 평소 발레 공연에서는 팔지 않던 오페라극장 4층 좌석까지 티켓을 오픈했다. 60년간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들만의 리그’라는 원성을 샀던 국립극단은 독립법인 출범 첫 작품 ‘오이디푸스’를 전회 매진시키며 한국 연극의 새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말러 전곡 시리즈’는 암표가 인터넷에서 거래되고 있다. 게다가 단지 표만 잘 팔린 것이 아니다. 정말로 연주와 공연이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서울의 공연장에 앉아 있는 것이 행복한 순간들이다.
유럽에서 활동하던 발레리나들이 서울로 돌아오고, 세계 정상급 지휘자 정명훈이 국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국내 관객들이 순수예술 장르에도 몰리고 있다. 뉴욕과 런던의 주요 오페라하우스 주역 테너 김우경도 국립 오페라단에 출연한다고 한다. 소수의 스타급 예술가들이 잠시 귀국 공연을 하던 시절을 지나 이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클래식 붐을 일으키고 있다.
뉴욕 하면 브로드웨이, 런던은 웨스트엔드가 떠오르듯 도시는 문화로 기억된다. 이것은 단기간의 관심과 소수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대중예술에서 출발한 한류를 단단히 하고 그 생명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순수예술로의 한류가 필수적이다. 경계를 넘는 순수예술의 힘과 우리나라 예술가 개개인의 역량이 순수예술의 한류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도시, 국가 차원의 장기적인 투자가 절실하다.
소수 예술가의 희생과 뜨거운 팬들의 열광이 이루어낸 세계 속의 한류와 한국 속의 클래식 붐은 이제 클래식 한류, 순수예술 한류로의 투자로 기본을 다져야 지속성을 가질 수 있다. 개인 예술가와 관객들은 준비가 돼 있다. 소중한 경험과 자산을 이제 국가 전략으로 투자해야 할 때다. 노들섬에 오페라하우스가 들어서고 한강변에 대중예술 공연장이 지어지는 꿈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