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계산상으로 파프리카 씨앗 한 알은 500원 가량한다. 파프리카 한 개에 보통 1000원한다고 치면 소매가의 절반 가량이 파프리카 씨앗 값이라는 애기다. 파프리카 씨앗 만큼 귀하신 몸도 없는 셈이다.
여기서 잠깐 퀴즈 하나. 국내 생산량의 80% 이상을 수출하는 파프리카가 국내산일까, 외국산일까?
물론 대형마트 등 시중에서 파는 파프리카 원산지는 한국으로 표기돼 있으니까 국내산이라는 논리가 맞다. 그런데 이 답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우리가 국내산이라고 믿고 먹는 파프리카가 물 건너온 외국산일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한 말도 어느 정도는 맞다는 애기다. 이는 파프리카 종자 대부분을 네덜란드나 일본에서 사들여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식탁이 외국산 종자에 점령당하고 있다. 우리가 국내산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는 제주감귤에서 부터 양파까지 국내산 채소와 과일 대부분이 진짜 원산지는 외국이라는 말이다.
겨울철 대표 과일인 제주감귤의 경우 국내에서 국산 품종을 재배하고 있는 면적은 불과 0.4%에 지나지 않는다. 올해 국내 제주감귤 농가의 조수입(필요 경비를 빼지 않은 수입)이 1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지만, 일본품종인 흥진과 궁천, 일남일호, 부지화 등이 99%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제주감귤의 경우 현재는 일본이 품종 보호 출원을 신청한 사례가 없어 로열티를 지불하고 있지는 않지만, 현재 수령이 많은 감귤나무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국산 품종이 보급되지 않는다면 한 해에만 수십억원의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무심코 제주감귤을 집을 때마다 일본에 로열티를 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즐겨먹는 청양고추도 예외가 아니다. 1990년대 후반 IMF 당시 자금난에 시달리던 국내 5대 종자회사 중 국내 시장에서 절대적 지분을 점유하고 있던 흥농종묘, 중앙종묘, 서울종묘, 청원종묘 등 4개사가 외국 자본에 넘어가면서 청양고추 종자도 몬산토 사에 넘어갔다. 현재는 품종보호기간(30년)이 끝나 로열티를 지불하지도 않고, 판권도 되찾아 왔지만, 유전자 원종은 여전히 몬산토사에 있고 육종도 그 곳에서 하고 있다.
청양고추 외에도 우리가 즐겨먹는 국산 채소, 과일 등의 상당수가 해외 종자로부터 생산돼 순수하게 국산으로 불릴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2012년 기준 양파 종자의 자급률은 15.5%에 불과하고, 토마토와 당근은 각각 16%, 44%에 지나지 않는다. 식생활이 바뀌며 우리 식탁에도 자주 오르고, 수출 효자 상품으로까지 등극한 파프리카 역시 네덜란드와 일본 품종이 시장의 태반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다.
과일은 더욱 심각한 상황이어서, 종자 자급률은 포도 0.8%, 사과 20%, 배 15%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주품종인 캠벨포도, 후지사과, 신고배는 품종보호기간이 끝나 로열티를 지급할 필요는 없지만, 국산 품종 보급이 빨리 이뤄지지 않는다면 향후 외국의 다른 품종을 이용해야 할 경우 로열티를 지급해야 하는 상황이 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국립종자원 양미희 연구관은 “최근 식생활이 서구화되고, 다문화 가정이 증가하면서 글로벌 음식문화가 빠르게 확산되고, 이로 인해 과거에 비해 이용되는 작물 및 품종이 더욱 다양화 되고 있다”며 “외국 품종의 국산화를 위해 대체 품종 개발 등 방어전략과 함께, 우리 품종ㆍ종자가 세계적으로 전파될 수 있도록 종자산업과 식품산업의 연계 해외진출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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