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만, 푸틴과 이해 더 일치해
OPEC+ 감산=反美 자원동맹
‘페트로 달러’ 체제에도 균열
유로존, 에너지 대란에 분열
글로벌 경제·금융질서 요동
정치와 경제는 동전의 양면이다. 이번에도 결국 에너지 전쟁이다. 지난 50년간 세계 원유 시장을 통치하던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밀월(蜜月)이 깨질 모양이다. 에너지 시장은 물론 글로벌 경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잘 읽어야 한다. 우선 사우디가 러시아와 손잡고 감산에 나선 이유를 살펴보자.
석유수출국기구(OPEC) 자료를 보면 글로벌 원유 일평균 수요는 2018년 110.2만 배럴에서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된 2020년 91.2만 배럴로 줄었다. 코로나19 영향이 줄며 지난해 96.92만 배럴, 올해 100만 배럴로 늘어나는 추세다. 내년에는 102.7만 배럴로 예상된다.
생산은 2019년 100.2만 배럴로 수요에 못 미치지만 2020년 93.9만 배럴로 뚝 떨어진다. 하지만 지난해 95.3만 배럴로 다시 늘어나며 수요 우위가 된다. 올 들어 코로나19으로 인한 경제활동 위축이 완화돼 수요 우위는 계속된다.
공급이 부족해진 상황에서 산유국 별 생산량이 눈길을 끈다. OPEC을 제외한 산유국들의 올 예상 공급이 71.2만 배럴로 2019년(70.8만 배럴) 보다 많다. 유럽의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미국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이 산유량을 크게 늘렸다.
OPEC의 올 평균 산유량은 2019년의 97% 수준이다. OPEC이 생산을 줄이지 않으면 공급 우위가 된다. 서방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유가 안정이 필요하다. 사우디는 유가가 올라야 돈을 더 많이 번다. 서로의 이해가 엇갈린다.
최근 10년 새 미국과 사우디 사이는 많이 달라졌다. 1970년대 초 1차 오일쇼크 직후 미국은 사우디와 모든 원유 국제거래를 달러로만 한다는 ‘페트로(petro) 달러’ 협정을 맺는다. 금 대신 원유를 기반으로 달러를 찍게 되면서 미국은 오일쇼크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미국은 그 대가로 사우디에 최신예 무기 등을 가장 우선으로 제공하며 안보를 지원했다.
하지만 셰일가스가 개발된 이후 미국에게 사우디의 중요성은 낮아진다. 미국은 더 이상 중동산 원유를 수입하지 않더라도 에너지를 자급할 수 있게 됐다. 서로 돕던 양국은 오히려 에너지 시장에서 다투는 사이가 됐다.
미국이 자국에서 생산된 셰일가스를 사용하면서 배럴당 100달러를 넘던 국제유가는 2014년 하반기 급락해 2016년 초에는 20달러 초반까지 밀렸다. 미국의 셰일가스 개발에 맞서 사우디가 증산에 나선 결과다. 중동산 원유는 개발단가가 낮다. 셰일가스는 개발과 생산 단가가 높아 유가가 일정 수준 아래로 떨어지면 채산성을 맞추지 못한다. 미국의 셰일가스를 고사시키기 위한 사우디의 ‘무제한 공급작전’이었던 셈이다. 이른바 ‘미국·사우디 1차 원유 전쟁’이다.
사우디가 미국을 공격한 배경에는 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가 있다. 살만 왕세자는 사우디 왕국 역대 최연소 국왕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형제 상속인 사우디 왕가는 초대 국왕인 이븐 사우드의 아들들이 왕위를 이어왔다. 현재 알 사우드 국왕은 이븐 사우드의 25번째 아들이다. 살만은 삼촌들을 제치고 왕위계승권을 쟁취했다. 통치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데, 결국 유가가 높아야 가능하다. 살만 왕세자는 집권 이후 석유에 대한 왕실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하지만 ‘미국·사우디 1차 원유 전쟁’에서 더 큰 피해를 입은 쪽은 사우디다. 유가하락으로 재정이 타격을 받으면서 더 이상 ‘무제한 공급작전’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미국 역시 ESG 열풍으로 셰일가스 개발과 생산이 정체된다. 2017년 하반기부터 유가는 다시 반등한다. 일단 ‘1차 미·사 원유전쟁’은 끝났지만 살만 왕세자로서는 미국이 달가울 리 없다. 2018년 살만 왕세자가 사우디 정부를 비판하던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를 암살하면서 미국과의 사이는 더욱 벌어진다.
살만 왕세자를 비판하던 바이든 대통령이 최근 직접 사우디 방문을 했음에도 결국 OPEC+는 감산 결정으로 서방의 ‘뒤통수’를 쳤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유가 하락을 원하는 미국과 달리 러시아는 전쟁을 위해 돈이 필요하다. 사우디와 러시아가 주도하는 OPEC+의 이번 결정은 살만과 푸틴의 이해가 일치한 결과라는 게 미국의 입장이다. 미국은 즉각 전략비축유 방출, 원유수출제한 해제 등을 언급하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미국 민주당에서는 “사우디에 제공한 미사일 방어시스템을 철수 시키자”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다. ‘미국·사우디 2차 원유 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모습이다.
미국과 사우디 사이가 벌어지면서 이란에 대한 서방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란은 천연가스 매장량이 러시아에 이어 세계 2위다. 석유 매장량은 베네수엘라, 사우디, 캐나다에 이어 세계 4위다. 핵개발로 국제 제재를 받아 자원 수출이 제한된 상태다. 이란이 국제 에너지시장에 복귀한다면 공급증가 효과가 상당할 수 있다. 하지만 이란은 1979년 혁명 이후 미국 보다 소련, 러시아, 중국과 관계가 깊다. 최근에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직접 테헤란을 방문했을 정도다. 미국의 경제제재 속에서도 중국에 원유와 천연가스를 수출했다. 특히 시아파 국가로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와는 앙숙이다. 에너지 시장에서 스스로의 잠재력을 잘 아는 이란이 미국의 뜻대로 움직일 지는 미지수다.
최근 독일은 에너지 안보를 위해 2000억 유로 규모의 가격안정화 대책을 발표했다. 기업과 가계에 2024년까지 에너지 구입에 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는 내용이다. 독일이 보조금을 무기로 에너지 시장에서 구매력을 높이면 그만큼 다른 나라들은 물량 확보에 불리한 입장이 된다. 프랑스도 내년 가정용 가스가격 상승률을 15% 이내로 제한하는 사실상의 보조금 정책을 밝혔다. 유럽연합(EU) 내에서도 ‘잘 사는’ 독일과 프랑스가 사실상 에너지 ‘입도선매’를 예고하면서 이탈리아 등 ‘덜 잘 사는’ 회원국들의 불만이 높다. 하지만 독일과 프랑스 입장에서는 에너지 대란 위기에서 ‘다른’ 나라들을 위해 재정을 지출할 생각이 없다. 단일 경제권인데 ‘각자도생’의 대응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미국과 사우디의 밀월이 끝나면 ‘페트로 달러’가 위태로워 진다. 미국이 마음대로 달러를 찍어낼 수 있는 배경에는 국제결제 통화로서의 기능 때문이다. 인류의 생존에 필요한 원자재와 식량 등의 글로벌 결제 기반이다. 원유와 달러의 연동이 약해지면 글로벌 경제의 기본 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 가뜩이나 달러 초강세로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가 외환 부담을 실감하고 있는 상황이다. 설상가상으로 ‘겨울 에너지 대란’을 앞둔 유럽연합에서 회원국 간 갈등이 심화되면 세계 2대 통화인 유로화의 안정성도 위협받을 수 있다.
일부 시장 전문가들이 이번 OPEC+의 감산 결정에 대해 그 규모가 크지 않아 시장영향력이 제한적이라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규모로만 보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감산 결정이 그 동안 글로벌 에너지 시장을 지탱해오던 질서가 붕괴하는 조짐이라면 그 의미를 결코 작게 볼 수 없다. 이미 ‘세계화(globalization)’ 패러다임은 저물고 있다.
인류 역사를 바꾼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가 자원이다. 자원 확보 경쟁은 전쟁으로 폭발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새로운 정치·경제 질서로 이어졌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이 제기된다. 미국의 경제봉쇄에 직면한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것이란 우려도 커지고 있다. 미국과 중·러의 갈등이 깊어가는 가운데 북한은 노골적으로 미사일과 핵전력 강화 야욕을 드러냈다. 경제가 정치이고, 정치가 경제다. 작은 조짐 하나도 그 의미를 깊이 곱씹어 볼 때다.
kyho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