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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린이·테린이 지겹다면?" 취미계 '에르메스'라는 이것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tvN 드라마 ‘빈센조’ 속 송중기가 극중 말을 타는 장면에서 바버 비데일 자켓을 착용한 모습. [tvN]

[헤럴드경제=김유진 기자] “나 승마용품 팔던 브랜드야~”.

이렇게 말하는 럭셔리 브랜드가 있다면, 그 말뜻의 속내는 타짜 속 정마담의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대사와 흡사하다.

에르메스를 비롯한 럭셔리 브랜드 가운데는 유독 승마용품 제작사로 시작한 곳이 많다. 승마가 과거 귀족계층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귀족들을 위한 물건이라면, 당연히 최신 유행과 최고급 품질을 지향했을 터. 럭셔리 승마에서 시작된 뿌리를 유난히 강조하는 데엔 ‘우린 그만큼 오래됐고, 고급이야’라는 자부심이 깔려있다. 콧대 높은 샤넬마저 섣불리 흉내내다 비웃음을 사게 하는 그들만의 세상, 대체 얼마나 대단한 지 파헤쳐보자.

[구찌 유튜브 영상캡처]
에르메스·구찌, 브랜드의 ‘뮤즈’가 된 스포츠
[에르메스 홈페이지]

하이엔드 명품의 대표 주자 에르메스는 1837년 말 안장과 마구 용품을 만들어 팔던 가게에서 출발했다. 로고를 장식한 말과 사륜마차는 태생부터 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브랜드 정체성을 보여준다.

특히 말 안장(새들, Saddle)을 만들 때 사용하던 ‘새들 스티치’는 에르메스의 뛰어난 가죽 세공 능력의 정수로 꼽힌다. 한 올만 튿어지면 두두둑 튿어지는 기계식 재봉과 달리, 바느질을 두 번 겹쳐 쉽게 풀리지 않게 한 박음질 방식이다. 역동적인 말의 움직임과 지속적인 마찰을 견디는 새들 스티치 덕에 한 명의 장인이 일주일에 두 개도 다 못 만든다는 ‘버킨백’의 희소성이 알리바이를 얻게 됐다.

1950년대 초반 활약한 배우 그레이스 켈리(왼쪽 사진)와 그의 남편 모나코 국왕 레니에 3세. 켈리가 임신 중 살짝 배를 가리며 든 모습이 포착돼 인기를 끌었던 에르메스의 버킨백(오른쪽). [온라인커뮤니티·에르메스 홈페이지]

1921년 피렌체에서 시작한 구찌도 승마 모티프를 디자인에 야무지게 차용했다. 일단 창업주 구찌오 구찌부터가 승마용 가죽제품을 납품하던 피혁업자 출신이다. 유래를 알고 보면 더 재밌어지는 디자인이 넘쳐나는 브랜드 중 하나다.

말 또는 승마와 관련된 이미지를 활용한 브랜드 로고들.

이밖에 유수의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가 ‘말 천지’다. 버버리, 에트로, 아이그너, 롱샴, 셀린느는 물론 포르쉐, 페라리 등 스포츠카 브랜드 로고에도 말 형상은 빠짐없이 등장한다. 귀족적이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지향하는 럭셔리 브랜드에 있어서 상류계급의 아비투스(habitus·습속(習俗))인 말과 승마는 기가막힌 형상화의 소재인 셈이다.

바버·구찌·디올…세월 견뎌낸 스테디셀러, 알고 보면 ‘승마룩’

승마 코드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패션 디자인 곳곳에 숨어있다. 올 봄에도 어김없이 남성들의 데일리룩을 책임진 바버(barbour)의 비데일 왁스 자켓이 본래 승마용 제품이라면 어떤가. 1980년 출시된 뒤 무려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사랑받으면서 어느새 일상복이 됐지만, 본래는 말을 탈 때 입기 위한 용도로 제작된 옷이다. 재작년 tvN 드라마 ‘빈센조’ 속 송중기 역시 극중 말을 타는 장면에서 비데일 자켓을 착용했다.

구찌 글로벌 엠버서더인 걸그룹 뉴진스의 하니가 ‘홀스빗’(Horsebit) 디자인을 활용한 구찌 가방을 든 모습(왼쪽), 에르메스 승마용 홀스빗(오른쪽). [구찌][에르메스]

구찌의 아이코닉 디자인 중 하나인 ‘홀스빗’(Horsebit) 장식은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이란 뜻이다. 창업주 구찌오 구찌(GUCCIO GUCCI)와 그 아들들이 실제 재갈을 본 떠 만든 금속 장식을 디자인 곳곳에 활용했다.홀스빗은 구두·가방 등에 두루 적용된 디자인이지만 누가 뭐래도 가장 유명한 건 홀스빗 로퍼다.

홀스빗 디자인을 향한 구찌의 사랑은 유별나다. 한때 구찌에서 특허까지 내려고 할 정도로 자부심이 엄청났다. 비록 법원을 설득하진 못했지만, 70년 넘게 스테디 셀러로 자리잡은 구찌의 홀스빗 로퍼야말로 수많은 아류작들을 등장케 한 장본인이다.

디올 새들백을 착용한 수지(왼쪽), 디올 새들백(중간), 에르메스에서 판매 중인 말 안장. 새들백은 존 갈리아노가 독일계 호주인 사진작가인 헬무트 뉴튼이 찍은 ‘Saddle I’ 화보 가운데 승마 부츠 차림에 말 안장을 걸친 여성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는 소문이 있다. [인스타그램·디올·에르메스]

디올이 1999년 출시한 ‘새들백’은 말에 얹는 안장(saddle) 형태를 가방으로 구현한 디자인이다. 당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존 갈리아노의 역작으로도 불리는 새들백은 디올의 ‘D’ 로고 장식이 포인트다. 마침 말 안장 양쪽에 다는 D자 스터럽(stirrup, 등자)의 형태와도 닮아있다.

가을·겨울 기본 아이템으로 자리잡은 첼시(Chelsea) 부츠 역시 승마용 반부츠로 시작됐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 런던에서 탄생한 이 신발은 옆면을 신축성 있는 소재로 만들어 발에 꼭 맞도록 만든 승마용 반부츠였다. 신고 벗기 편리한 디자인 덕에 실용성이 중시됐던 세계대전 시기를 지나며 1940년대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잡았다.

1871년 출간된 ‘편자 - 성 둔스타노와 악마의 전설’ 삽화(왼쪽), 아이그너(Aigner) 시계(중앙), 로에베 2020 봄·여름 패션쇼에서 홀스슈 가방을 든 모델의 모습(오른쪽). [아이그너] [로에베]

U자형 말 발굽을 뜻하는 ‘편자’(Horseshoe, 홀스슈) 역시 익숙한 디자인이다. 서양 사회에서 말 편자는 행운의 상징이다. 오죽하면 ‘편자를 발견하면 행운이 온다(If you find a horseshoe, you’ll have a good luck!)’는 서양 속담이 있을 정도다.

말은 동물 중 유일하게 편자가 필요한 동물이다. 승용마와 경주마 발바닥엔 말발굽을 보호하고 갈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붙인다. 스페인 브랜드 로에베(LOEWE)의 홀스슈 백, 독일 아이그너 시계 등이 말 발굽을 본떴다.

말 편자는 아래(∩)로 걸면 액운이 쏟아져나가고, 위(∪)로 걸면 복을 쌓아 담을 수 있다는 속설도 전해진다. 돼지 저금통에 동전을 모으던 한국인들처럼, 부(富)의 상징을 통해 행운을 비는 건 만국 공통인 듯싶다.

“이봐 샤넬, 자넨 에르메스가 아닐세”
2022년 1월 파리 패션위크에서 열린 샤넬 패션쇼. 그레이스 켈리의 손녀 샬롯 카시라기가 말을 타고 런웨이를 질주하는 모습. [샤넬 유튜브]

럭셔리한 승마 코드가 명품 브랜드에 모두 성공 스토리를 가져다 준 것은 아니다. 실패한 사례도 있다. 다름 아닌 샤넬, 오래 전도 아닌 불과 작년 일이다.

2022년 1월 파리 패션위크에서 열린 샤넬 패션쇼엔 말을 탄 모델이 한 명 등장했다. 다름 아닌 할리우드 배우이자 모나코 공비 고(故) 그레이스 켈리의 외손녀 샬롯 카시라기였다.

문제는 샬롯 카시라기의 할머니가 에르메스의 상징과도 같은 ‘켈리백’ 속 그 캘리라는 점이다. 에르메스의 상징과도 같은 켈리의 손녀를 불러, 에르메스의 상징인 말에 태운 샤넬. 업계 안팎에서 ‘샤넬이 에르메스를 따라하는 것 아니냐’는 냉소적 반응이 잇따랐다.

에르메스가 후원하는 승마 대회 '그랑 팔레 에페메르'(Grand Palais Éphémère). [에르메스 유튜브 영상 캡처]
유럽 VVIP 사교모임 중심엔 골프 아닌 ‘승마’

유럽 하이엔드 시장에서 각국 왕실과 인맥을 맺고 비즈니스에 나서려면 승마는 필수다. 에르메스, 로로피아나, 구찌 등 럭셔리 브랜드는 꾸준히 승마 대회를 후원해왔다.

에르메스는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 에페메르(Grand Palais Éphémère)에서 매년 열리는 ‘소 에르메스’(Saut Hermès) 대회를 후원한다. 말을 타고 장애물을 뛰어넘는 이 쇼 점프 대회는 국제 승마 연맹 규정상 가장 높은 등급인 CSI 5 스타에 해당되는 행사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고가 점퍼로 유명세를 탄 ‘로로 피아나’(Loro Piana) 역시 지난해 89회차를 맞이한 이탈리아의 세계적 승마대회인 ‘피아차 디 시에나’(Piazza di Siena)를 후원, 주최하고 있다. 구찌 또한 1972년 시작된 파리 마스터스 대회를 2009년부터 공식 후원 중이다.

'#골프'로 올라온 SNS 게시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코로나19 발생 이전인 2019년을 기준으로 승마를 정기적으로 즐기는 인구는 5만여명에 불과했다. 정기적으로 승마를 즐기는 해외 인구가 독일 39만명, 미국 20만명 규모인 것과 비교하면 한국에서 대중화는 걸음마 단계다. [인스타그램]
테니스·골프 다음 타자…승마 뜰 때 됐다고?

그렇다면 각종 SNS를 점령한 골린이·테린이의 인증샷이 늠름한 말과 함께 찍은 이미지로 뒤바뀌는 날이 과연 올까? 지난 15일 기준 인스타그램에 달린 해시태그(#)는 ‘골프’ 592만개, ‘테니스’ 100만개 그리고 ‘승마’가 28만개다.

아직까지 국내에선 대중적 취미는 아니지만, 최근 국내 패션·스포츠웨어 업계에서는 테니스와 골프를 이을 취미계 블루오션으로 승마를 예의주시 하고 있다. 패션 트렌드와 스포츠가 연동돼 시너지 효과를 내는 현상이 또 한번 발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테니스·골프 스커트의 심미적 요소가 여성 테린이와 골린이 양산에 큰 역할을 했듯, 클래식 하면서도 위엄있는 승마복만의 개성이 2030 세대에 소구력을 가질 수 있지 않겠냐”며 조심스레 다음 유행 예측에 나섰다. 승마 모자, 부츠, 타이트한 바지 등의 새로운 요소가 또 다른 유행을 증폭시키지 않겠냐는 관측이다.

kace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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