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소년단 리더 RM이 2019년 공식 SNS에 올린 달항아리 사진. 권대섭 작가 작품. [BTS 인스타그램] |
[헤럴드경제=김유진 기자] 한국 대표로 영국 왕실을 위한 선물을 고르게 된 당신, 무엇을 골라야 한국의 미(美)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고인이 된 엘리자베스 2세를 비롯, 상상만 해도 마음이 웅장해지는 VVIP를 위한 선물로 쉴새없이 이름을 올려온 스튜디오가 있다. 처음 보면 고미술 같다가도, 알고 보면 추상적이고, 계속 보면 현대적이다. 뉴욕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여성 CEO가 한국인의 헤리티지 가운데 이 시대를 관통할 만한 요소들만 쏙쏙 뽑아 세련되고 능숙하게 변주한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조선백자 달항아리를 닮은 진주빛 항아리다.
80년대생 작가의 시각으로 빚어낸 21세기 달항아리는 이전과 뭐가 다를까. 화려한 중국·일본 도자기에 비해 극강의 미니멀리즘으로 빚어낸 ‘원조’ 조선백자는 어째서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사랑받을까.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가 지난달 25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 관저에서 열린 친교행사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질 바이든 여사와 준비한 선물을 교환하고 있다. [연합] |
류지안 작가의 ‘더 문 화이트 48(THE MOON_WHITE48)’. 질 바이든 여사는 국빈 선물로 건네 받은 류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연신 ‘뷰티풀(아름답다)’이라며 감탄하는 모습이 포착돼 눈길을 끌었다. 류 작가는 “제 작품 중에 바다와 파도의 흐름을 시각화한 오브제가 있다. 그 시리즈의 확장으로 밤하늘에 떠있는 달, 밤바다를 비추는 달을 생각하다 달항아리의 형태를 차용했다”고 설명했다. [아리지안] |
지난 달 윤석열 대통령 방미 일정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거대한 항아리가 있다. 윤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바이든 내외에게 선물로 건넨 아트스튜디오 ‘아리지안’(ARIJIAN) 작품이다. 은은하고 잔잔히 흐르는 물결처럼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달항아리 모양새지만, 자세히 보면 겉면은 흔한 도자기와 달랐다. 자개장에서나 보던 빛나는 조개 속껍질로 전면을 빼곡하게 세공해 진주처럼 은혜롭게 반짝이고, 물결처럼 곡면을 따라 흐른다.
겉뿐 아니라 속도 다르다. 달항아리 형태를 차용했지만 소재는 흙이 아니다. 자동차나 요트를 만드는 소재를 접목시켜 현대적으로 재해석 했다. 아리지안을 이끄는 류지안 작가는 해당 작품 시리즈에 대해 “대비되는 것들을 하나로 공존시키는 작업”이라 말한다. 그는 자연에서 온 자개로 겉면을, 인공적이고 현대적인 재료로 형태를 만들었다. 바다를 담는다는 마음으로 하얗고 푸른 빛의 자개를 사용하고, 자개 조각들을 파도의 흐름으로 보석처럼 이어넣었다.
류지안 작가. [아리지안] |
류 작가는 어린 시절 아버지인 청봉 유철현 작가의 나전칠기 공방에서 자개를 처음 만났다. 바쁘게 돌아가던 1970~1980년대 공방에서 일상처럼 볼 수 있던 재료였다. 익숙하게만 생각했던 자개를 다시 보게 한 건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한 이후다. 한국을 떠나 생활하면서, 그동안 너무 익숙해져버린 한국의 헤리티지를 다시금 이방인의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류 작가는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독립적인 하나의 주체로 재료 자체의 물성(物性)에 집중하게 되는 새로운 시각이 작업으로 이어졌다”며 “기존의 뿌리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키워가면서 현 시대와 연결하려는 노력이 제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말한다.
류지안 작가의 이름을 따서 만든 ‘아리지안’은 아름다운 빛을 새기다라는 뜻이다. 류 작가는 개인 작품 활동과 함께 아트스튜디오 아리지안(ARIJIAN)을 이끌고 있다. 스튜디오 이름인 아리지안은 아름답다의 우리말인 ‘아리’에 ‘빛을 새기다’라는 뜻인 작가의 이름 ‘지안’을 더해 만들었다. ‘아름다운 빛을 새기다’라는 뜻이다. [아리지안] |
그는 나전칠기를 계승한 원로 장인들과의 협업을 통해 아리지안을 이끌고 있다. 이들은 류 작가에겐 또다른 의미의 아버지 같은 존재다. 현대 산업재료와의 혼합을 앞장서 지지해 준 부친처럼, 자개라는 재료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류 작가를 응원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Rolls-Royce Motor Cars Seoul. [아리지안] |
2013년 아리지안 스튜디오 론칭 후 딱 10년이 흘렀다. 아직까지 스튜디오 이름은 대중에게 생소하다. 다만, 아리지안와 협업한 브랜드는 롤스로이스 등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만 한 명품 중 명품들이다. 45개국 넘는 정상과 각국 왕실을 위한 ‘국가대표’ 선물로도 맹활약 했다.
시작은 2014년 하이엔드 쥬얼리 브랜드 ‘반클리프 아펠’이었다. VVIP 고객들을 위한 한정판 선물을 아리지안에서 제작했다. 뒤이어 소수의 국내 메르세데스 ‘마이바흐 S클래스’ 오너를 위한 웰컴키트를 제작했다.
여왕과 디자이너를 위한 선물도 만들었다. 샤넬 수석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의 내한과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위한 선물로도 선택받았다. 지난해 방한한 크리스찬 디올의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Maria Grazia Chiuri) 여사를 위한 선물도 아리지안이 제작했다.
BTS (방탄소년단) 2021 ‘DALMAJUNG’ Shoot. 자개 공예로 완성한 오브제와 가구가 아리지안 제품. 한국 간판 브랜드 삼성과 아이돌 BTS와의 인연은 지난해 성사됐다. BTS의 '달마중' 영상과 삼성 '2022 Neo QLED TV' 인트로덕션 데모 비디오에도 아리지안 가구가 등장해 존재감을 뽐냈다. 최근엔 한국 드라마 ‘더 글로리’, ‘재벌집 막내아들’ 등 촬영장에 럭셔리 소품으로도 등장했다. [방탄TV 유튜브] |
윤 대통령의 방미 선물로 화제가 됐지만, 아리지안은 미술품에 관심을 가진 이들 사이에선 일찌감치 입소문을 탔다.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arijian_official) 팔로워만 2만7000명으로, 정통 공예로 이름을 알린 기성세대 작가들에게도 인지도 면에선 뒤지지 않는다. 자개 공예를 현대화 한 가구, 오브제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지만 그 가운데서도 조선 백자 달항아리 형상을 재해석한 작품이 가장 눈길을 끈다.
류 작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달항아리는 현재 그 원본인 조선 백자가 미술계의 큰 화두 중 하나다.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을 차용·응용한 신진 작가들이 등장함과 동시에 고미술 전시까지 활기를 띄고 있다. 한국 고미술에는 거리를 뒀던 젊은 층까지도 조선 백자에 담긴 헤리티지에 새롭게 눈떴다는 반응이 쏟아진다.
미술 애호가로 알려진 BTS 멤버 RM(김남준, 31)은 2019년 11월 권대섭 작가(72)의 달항아리 1점을 구입한 뒤 이를 품에 안은 인증샷을 SNS에 올려 국내외 젊은 층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창업자인 미국의 빌 게이츠가 운영 중인 재단에서도 지난 2011년 달항아리 그림으로 이름을 알린 최영욱 작가(60)의 작품 3점을 구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국립중앙박물관] |
끊임없는 인기 속에 달항아리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도 몇년새 크게 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21년 새단장을 감행하며 상설전시관 3층에 달항아리를 만날 수 있는 분청자기 백자실을 따로 마련했다. ‘백자 달항아리’를 위한 단독 공간에는 전용 의자까지 배치해 관람을 도왔다. 조선 백자 가운데서도 유달리 인기가 많은 달항아리를 위한 특별 대우다.
16세기 백자 반철채 호(왼쪽). 19세기 백자철채(白磁鐵彩) 통형 병(오른쪽). ‘조선의 백자:군자지향(君子志向)’ 전시에서 만날 수 있다.[리움미술관] |
요즘 젊은이들은 왜 달항아리에 열광할까?
고미술 전문가로 12년간 내공을 다지다 드디어 때를 맞이한 이준광 리움미술관 책임연구원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이달 28일까지 열리는 ‘조선의 백자:군자지향(君子志向)’ 전시를 기획한 장본인이다. 조선 백자만 모아 기획한 이번 전시는 리움미술관 역대 고미술 전시 중 가장 많은 10만여 명의 관람객을 달성할 것으로 전망된다. 관람객 상당수가 2030 세대다.
‘조선의 백자:군자지향(君子志向)’ 전시가 열린 리움미술관. [헤럴드DB] |
이 연구원이 꼽은 달항아리의 매력은 의외로 ‘불량美’다. 그는 “달항아리는 불량품이 재밌다”고 말한다. 달항아리는 커다란 형체 탓에 한번에 만들지 못한다. 밥그릇 두개를 만들고 위아래로 포개듯 조립해 만들어진다. 이때 잘 빚은 양품은 이음새가 매끄럽고, 측면에서 봐도 동그랗다. 국보가 된 양품들이 대개 이렇다.
그렇다면 조금 모자란 녀석들은 어떻게 될까. 그는 “살짝 무너지거나 이음새가 도드라지는 작품들은 오히려 360도 다양한 방향에서 각기 다른 매력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완벽한 구가 되지 못한 흠결이 요즘 사람들 눈에는 재미있는 요소로 비친다는 것이다.
이 연구원은 “조선 사람들은 ‘아까우니까 그냥 쓰자’하는 경제적 논리로 바라봤을 하자품인데, 요즘 사람들 눈엔 모자라도 버리지 않고 쓴 조선의 관용미로 해석이 된다. ‘무너지고 비뚤어져도 괜찮아’ 이런 의미부여가 가능한 거다. 물론 가격은 완벽한 형태가 더 비싸다(웃음)”라고 설명했다.
그는 “고미술을 계승하지 않더라도 현대 공예에서 다양한 소재로 백자 형상을 차용·응용하는 사례도 많다. 유리, 나무, 자개 등을 활용하는 사례다. 도자기라는 물성(物性)도 중요하지만, 최근에는 달항아리 ‘형태’를 더 주목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 추상화가 마스 로스코의 작품이 워싱턴DC의 워싱턴내셔널갤러리 전시관에 전시된 모습. 김건희 여사와 질 바이든 여사가 관람하고 있다. [연합] |
최근 들어 주목받는 달항아리에게도 어두운 시절은 있었다. 고려청자의 화려함에 견줘 너무 단조롭다는 대중의 평가를 받기도 했고, 일본·중국 도자기에 비해 너무 소박하다는 얘기도 들었다. 모두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들 사이에서 왕왕 나왔던 반응이다. 이런 냉대는 언제부터 사라졌을까.
이 연구원은 그 답을 현대미술에서 찾았다. 현대미술을 보는 대중들의 눈이 뜨이면서, 이방인의 눈으로 조선 백자를 재평가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한때는 서양화를 볼 때도 추상화보다 고전 미술의 재현 능력을 높게 쳤던 대중들이 추상성에 주목하게 된 게 바로 지금이라는 것.
4억3000만원에 낙찰된 박서보 화백의 2000년대 단색화. 〈묘법 No.070505〉. [서울옥션 제공] |
그는 “현대미술에서 단색화가 10~15년 사이에 주목을 받지 않았나. 단색화의 매력은 조선 백자의 차분함과 상통하는 맥락이 있다. 현대미술 보는 눈으로 고미술을 보니, 조선 백자가 눈에 띈 것 아니겠냐”고 했다. 그러면서 “그간 한국인들이 백자의 매력을 다 몰랐다. 백자를 전면적으로 다룬 전시를 기획하며 모아놓고 보니, 심심한 줄만 알았던 백자가 의외로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어 놀랍다는 반응이 잇따른다. 특히 개성이 도드라지는 지방 백자를 보면서 재밌어들 하신다”고 했다.
백자철화 초화문호. 17세기 후반. 무다 토모히로 촬영.'사진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
그는 달항아리 외에도 더 많은 조선백자의 매력이 재조명 받기를 바란다. 그가 특히 달항아리 다음 순번으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후보로 꼽은 건 ‘철화백자’(鐵華白瓷)다. 말 그대로 철 안료로 그림을 그린 백자다. 철안료로 그린 그림의 발색이 농도에 따라 밤색, 빨간색, 먹색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달 항아리를 보고 명상에 잠긴다면 철화자기는 웃기다는 반응이 많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한 백자철화초화문호(위 사진)를 보면, 국화를 외계인처럼 그렸어요. ‘조선의 피카소’라 불릴 만큼 변화무쌍하고 재밌는 백자, 포스트 달항아리는 무궁무진합니다.”
뿌리로부터 멀어진 세대의 눈으로 발견한 한국의 헤리티지. 너무 오랫동안 닫혀있어 벽인 줄만 알았던, 새로운 문이 열렸다.
kacew@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