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미쉘 바스키아, 죽음을 타고(일부 확대) [Singulart Magazine]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검은 청년은 당돌했다.
1982년, 미국 뉴욕의 레스토랑. 앤디 워홀은 화상 브루노 비쇼프버거를 기다렸다. "그간 없던 끝내주는 놈을 데려오겠다"는 말에 약간 들뜨기도 했다. '그간 없던'? 워홀은 그 말이 반가웠다. 추상회화니, 추상표현주의니 하는 고상한 분들의 작품은 이제 속이 울렁거릴 만큼 지겨웠다. "왔어?" 워홀이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듣고 말을 건넸다. "여전히 혈색 좋아 보이는구려." 비쇼프버거가 들어와 모자를 벗었다. 흘러내린 땀을 닦았다. 그의 뒤로 한 청년이 따라왔다. 검은 피부의 녀석은 무척 앳돼 보였다. "이 친구가 그…?" "그렇소. 요즘 핫한 자식이지. 자네를 만나고 싶다고 얼마나 노래를 부르는지." 비쇼프버거의 말에 청년은 씩 웃었다. 먼저 손을 내밀었다. "워홀 선생님, 꼭 뵙고 싶었어요. 저는 장 미쉘 바스키아입니다."
바스키아는 떨지 않았다.
대스타 예술가였던 워홀 앞에서 편하게 말하고, 제스처를 취하고, 농담도 했다. 바스키아는 워홀에게 자기 그림이 담긴 엽서 다발을 보여줬다. "사실래요? 싸게 드릴게요." 바스키아가 워홀에게 툭 던지듯 물었다. 나한테 팔겠다고? 이 녀석 봐라…. 워홀은 그런 바스키아가 흥미로웠다. "너무 대충 그렸는데?" 워홀은 한 번 떠봤다. 엽서 속 그림을 보고 심드렁하게 응수했다. 바스키아는 대놓고 실망감을 드러냈다. 워홀은 이 청년이 나지막이 혼자 중얼대는 말을 분명히 들었다. "쳇. 자기도 대충 그리면서."
앤디 워홀, 캠벨 수프 1 |
대충 만들고 많이 찍어 싸게 파는 것.
워홀은 바스키아가 마음에 들었다. 팝아트(Popular Art·대중예술). 그러니까 그가 주도하는 요즘 예술의 본질을 가차없이 할퀴는 냉소를 22살짜리에게 들을 줄 몰랐다. 사실 워홀은 바스키아의 그림도 인상 깊게 봤다. 그의 그림에는 무엇보다 자유가 있었다. 개성도 있었다. 투박하지만 야성적이었다. 유치하지만 유머러스했다. 고루한 화풍, 틀에 박힌 기법 따위는 한 스푼도 없었다. 파블로 피카소가 평생 찾아다닌 '어린아이 같은 그림'이 바로 이것일지도 몰랐다. 그간 예술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검은 청년이 그린, 여태 예술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개성있는 작품…. '이 녀석, 되겠는데?' 워홀은 입꼬리를 올렸다. 성난 안색의 바스키아에게 손을 건넸다. "그 엽서, 나한테 팔아. 얼마라고 했지?" 워홀이 호주머니를 뒤적였다. 바스키아는 그제야 활짝 웃었다.
장 미쉘 바스키아, 전사 [크리스티코리아] |
장 미쉘 바스키아, 두 사람(도스카베자스) [vanity fair] |
그해 바스키아는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검게 칠해진 인간이 돌진한다. 지루한 회화의 틀, 차별과 부조리로 얼룩진 현실의 틀을 깨부순다. 자유롭다. 고상함이라는 목줄, 엘리트 의식이라는 사슬도 없다. 은색 검을 휘두르는 그에게선 무거운 분노, 가벼운 귀여움 등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만 함께 느껴진다. 그렇기에 더 강렬하다. 바스키아의 그림 '전사'다. 훗날 3억2360만 홍콩달러(약 472억원)에 팔리는 작품이다. 워홀과 바스키아는 처음 만난 그날부터 의기투합했다. 워홀은 바스키아의 재능을 믿고 키우기로 했다. 바스키아 또한 워홀의 안목을 믿고 따르기로 했다. 바스키아는 이쯤 '두 사람'을 그린다. 특유의 자유로운 붓질을 마음껏 구사했다. 흥미로운 눈빛의 흰색 워홀, 의욕 가득한 검은 바스키아가 함께 있는 모습이다.
두 사람은 워홀의 작업실 '팩토리'에서 여러 작품을 함께 만들었다.
워홀이 캔버스에 실크스크린 작업을 하고, 바스키아가 그 위에 즉흥적으로 글과 물감을 덧입히는 식이었다. 워홀의 스타성을 날개로 단 바스키아는 더 높이, 더 멀리 날았다. 늘 그토록 꿈꿔왔던 자유, 자유, 오직 자유만을 향해. 바스키아는 그렇게 신표현주의의 세상을 마음껏 개척한다.
장 미쉘 바스키아 [The Andy Warhol Foundation] |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www.PabloPicasso.org] |
바스키아는 1960년,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바스키아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더 좋아했다. 아버지는 딱딱한 회계사였다. 예술에 조예 깊은 어머니는 웃음도, 눈물도 많은 사람이었다. 바스키아는 3살부터 그림을 그렸다. 어머니의 격려로 재미를 더 붙였다. 바스키아는 어머니와 뉴욕의 여러 미술관을 돌아봤다. 브루클린의 한 미술관에 어린이 회원으로 등록할 만큼 예술에 관심이 커졌다. 바스키아는 특히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의 한순간을 잊지 못했다. 어머니가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던 바스키아도 압도감에 몸을 휘청였다. 그 후부터였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
예술가 바스키아를 위한 어머니의 도움은 더 있었다.
바스키아는 예고치 않게 차에 치였다. 겨우 8살이었다. 꽤 큰 교통사고였다. 팔이 부러졌다. 비장(脾臟)이 으스러져 절제술도 받았다. 바스키아는 병원에서 멍하게 누워있었다. 그런 바스키아에게 어머니가 책을 선물했다. 당시 의대생들이나 보던 '그레이의 해부학(Gray’s Anatomy)'이었다. 할 일 없던 바스키아는 그 책을 읽으며 시간을 죽였다. 생각보다 재밌었다. 흥미를 느낀 바스키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해부학 드로잉 등 다른 자료도 찾아봤다. 인간의 뼈와 장기는 아름다우면서 섬뜩했다. 우아하면서도 소름이 돋았다. 이 자체로 강한 인상이었다. 훗날 바스키아는 해골과 뼈, 내장 기관들을 그대로 노출해 그리기를 즐긴다. 그만의 독창적 이미지로 삼는다.
장 미쉘 바스키아, Trumpet [King&McGaw] |
그런 바스키아의 삶에 벌써 먹구름이 몰려왔다.
바스키아는 몇 개월의 치료 후 퇴원했다. 이쯤 상극 같던 바스키아의 부모가 이혼 도장을 찍었다. 바스키아는 경제권을 쥔 아버지 밑으로 가야 했다. 둘은 당연히 잘 안 맞았다. 어머니 감성을 이어받은 바스키아는 허구한 날 아버지와 맞붙었다. 바스키아는 자존을 바랐다. 아버지는 통제와 구속을 원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더 영향을 받았는데, 사회는 왜 어머니 밑으로 보내지 않는지. 어린 바스키아는 이해하지 못했다. 바스키아는 자유와 부조리에 더욱더 관심을 가졌다. 학교에서 겪은 인종차별이 야성을 부추겼다. 바스키아는 가출했다. 잡혀오면 또 집을 나갔다. 그는 공원 의자에서 잠을 잤다. 머리를 빡빡 밀고 약을 먹었다. 학교도 그만뒀다. 그는 이때부터 자기 그림이 담긴 우표와 엽서, 티셔츠를 바닥에 깔았다. 돈을 받고 팔았다. 예술적 삶의 시작이었다.
이 과정에서 바스키아는 한 친구와 부쩍 친해졌다.
그 또한 자유에 목말랐다. 틀에 박힌 사고 따위 질색이었다. 그와 바스키아는 스프레이 마커와 오일 크레용 따위를 손에 쥐었다. "해보자." 그는 지저분한 거리의 외벽을 가리켰다. "이렇게 말이야." 치이익. 그는 담벼락을 마구 물들였다. 눈이 따가울 만큼 물감이 번졌다. 외벽이 물들었다. 연기 같던 스프레이 잔해가 걷혔다. 고작 먼지투성이의 낡은 담벼락이었던 그곳에 이제 무슨 형체가 있었다. 글자도 있었다. "이게 우리가 해야 할 예술 아니겠어?" 그는 목에 힘을 줬다. 그의 이름은 알 디아즈였다.
장 미쉘 바스키아가 그라피티 앞에 선 모습. |
'흔해 빠진, 개똥 같은.'
길바닥 그림 장사로 푼돈을 쥔 바스키아는 디아즈와 함께 그라피티(graffiti) 그룹을 결성했다. 세이모(SAMOⓒ)가 이름이었다. 언젠가 바스키아가 디아즈 앞에서 요즘 것들 예술을 보고 "Same Old Shit!"이라고 비난했는데, 이 단어들의 약자를 빼내 조합한 그룹명이었다. 순화하면 '그게 그거', '흔해빠졌다'는 뜻이었다. 당시 그는 17살이었다. 바스키아는 1977~1980년 사이 뉴욕 소호 거리의 외벽을 물색했다. 빈 담벼락과 지하철 벽면 등을 보면 스프레이로 거칠게 칠했다. 어린애가 그린 듯한 거친 선, 기지가 느껴지는 시(詩)의 구절 등이 특징이었다. 차려입은 백인들이 오가는 소호 거리가 뒤집어졌다.
[장 미쉘 바스키아 더 레이디언트 차일드 스틸컷] |
바스키아의 그라피티에는 그만의 철학이 물씬 묻어있었다.
달러($), 센트(¢), 엔(¥)과 함께 해골을 그렸다. 종종 슈퍼맨에서 따온 알파벳 'S', 찌그러진 듯 넙데데한 동그라미도 등장시켰다. 너희들, 점잖은 척하지만 솔직히 이런 걸 좋아하잖아? 대놓고 도발하는 듯했다. 굵은 검은색 선으로 왕관을 그렸다. 우리 흑인들도 이런 걸 쓰고 즐길 수 있다니까? 대놓고 자극하는 듯했다. "세이모는 실험실의 동물에게 암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등 자유, 이를 위한 저항에 대한 메시지도 함께였다. 바스키아는 한 번 그린 그라피티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거듭 지우고, 덧바르고, 끼얹었다. 바스키아의 그라피티는 그렇게 색과 형태가 쌓일수록 복잡해졌다. 마치 권위주의와 인종·이민자 갈라치기 등 부조리가 횡행하는, 그런 답답한 뉴욕의 자화상 같았다. "당신들이 말하는 그 지독한 예술, 엘리트적 허례허식으로 도도한 척하는 예술? 그게 예술의 다가 아니야. 예술은 자유를 통제할 수 없어." 훗날, 그래봤자 낙서 아니었느냐는 말에 바스키아는 이렇게 응수하곤 했다.
[장 미쉘 바스키아 더 레이디언트 차일드 스틸컷] |
바스키아는 그라피티에 늘 'SAMOⓒ'라는 흔적을 새겼다.
바스키아의 이 행동은 현대미술 장르로 그라피티가 들어가는 데 역할을 했다. '©'는 저작권 표시였다. 너희들 눈에는 외벽이지만, 내 눈에는 육중한 스케치북이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그 위에 칠한 모든 건 그냥 칠한 낙서가 아닌, 예술 정신이 담긴 작품이라는 의미였다. 실제로 사람들은 '©' 때문에 그라피티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다. 바스키아는 이로써 '작품은 종이 위에 그려야 한다'는 상식을 깨뜨렸다. 나아가 '낙서도 명작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통념을 끌고 왔다. 사실 뉴욕에는 원래도 그라피티가 있었다. 심지어 바스키아가 막 나서려고 할 시기에 뉴욕은 그라피티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시절 그라피티는 아예 막 그려진 게 많았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이라는 과시, 공권력을 괴롭히겠다는 심술 등이 강하게 뱄다. 철학은 흐릿했다. 작품성과 문제의식도 희미했다. 상당수는 찍찍 찍어 바른 후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훅 그리고 나면 추가 작업 없이 그대로 방치해 흉물이 될 때도 많았다.
'SAMOⓒ IS DEAD' |
그렇기에 바스키아의 그라피티는 차별성을 가졌다.
뉴욕 예술계가 세이모에 주목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바스키아와 디아즈는 찢어졌다. 바스키아는 명성을 꿈꿨다. 더 유명해지기를 갈망했다. 반면 디아즈는 익명의 악동이 되기를 원했다. 비주류 정신에 머물기를 희망했다. 뜻은 좁히지 않았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함께 스프레이를 쥐었다. 세이모의 일원으로 마지막 퍼포먼스를 했다. 뉴욕 거리 곳곳에 낙서를 새겼다. "세이모는 죽었다(SAMOⓒ IS DEAD)." 이렇게 공식 해체를 선언했다.
장 미쉘 바스키아, Untitled (Boxing Ring) [pinterest] |
"나는 17살 때부터 늘 스타가 되기를 꿈꿨다. 찰리 파커, 지미 헨드릭스 같은…."
바스키아는 이처럼 명성에 집착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림의 자유, 차별에서의 자유, 부조리에서의 자유 등 그의 철학을 설파하기 위해선 일단 유명해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예술 같은 낙서'를 열심히 그린들 화제가 되지 않으면 묻힌다고 생각했다. 흑인 복싱 선수, 흑인 인권 운동가, 흑인 재즈 아티스트에게 왕관을 그려넣는 그림 또한 알려지지 않으면 찻잔 속 태풍이 된다고 확신했다. 바스키아는 해방을 꿈꾸는 반군(反軍)이었다. 인기를 얻지 않으면 무엇 하나 달라지는 일 없다는 게 결론이었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
"고개를 돌려봐. 흑인은 한 명도 없다니까?"
언젠가 바스키아는 여자친구와 함께 뉴욕의 한 미술관에 갔다가 이런 말을 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여자친구는 입술을 비죽였다. 그 시절 미술관은 백인의 전유물이었다. 그리는 사람, 보는 사람 모두 대부분은 백인이었다. 정말로 흑인은 단 한 명도 찾기가 어려웠다. "심지어 그림 안에서도 찾을 수가 없네. 그치?" 여자친구가 맥 빠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 또한 맞는 말이었다. 드문드문 있긴 했다. 그림 속 가장 유명한 흑인은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에 있는 여성 정도였다. 그래봤자 올랭피아의 미모를 띄우고자 비교 대상으로 그린 장치였다. 바스키아는 여자친구의 그 말에 기죽지 않았다. "내가 왜 그림을 그리는지 알아? 흑인도 미술관에 올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야." 그의 결심이었다.
장 미쉘 바스키아, St. Joe Louis Surrounded by Snake [wikiart] |
바스키아는 착실하게 인지도를 쌓았다.
1979년, 바스키아는 방송에 출연했다. 글렌 오브라이언 진행의 생방송 쇼에서 이름을 알렸다. 화가 겸 설치 작가 케니 샤프, 그라피티 작가 키스 해링 등과도 친해졌다. 바스키아는 사실상 주류 미술계에 처음으로 등장한 흑인 화가였다. 세상은 고개를 든 당돌한 검은 예술가에 관심을 가졌다. 1980년, 바스키아는 첫 그룹 전시 '타임스퀘어 쇼'에서 화제성을 인정받았다. 그는 다음 해 뉴욕 뉴 웨이브 전에 참여한 20여명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혔다. 개인전도 성공적이었다. 카셀 도큐멘타 7, 휘트니 비엔날레 등에도 참여했다.
장 미쉘 바스키아,Victor 25448 [롯데뮤지엄] |
바스키아의 그림에는 신(新)표현주의라는 말이 따라왔다.
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지 않고, 화가의 철학과 가치관 등 정신을 함께 버무려 '표현'하는 화풍이다. 바스키아는 작정하고 질서의 틀을 깼다. 더 과감하고, 더 전투적으로 임했다. 대상을 거듭 파괴했다. 틈을 벌려 자기만의 철학을 마구 욱여넣었다. 그 결과 화가의 혼만 깃든, 거듭 해체된 끝에 뼈다귀만 남아버린 원시주의적 그림도 탄생하곤 했다. 빈센트 반 고흐, 에드바르 뭉크 등 옛 표현주의 화가들은 그나마 선을 지켰다. 최소한의 질서가 있었다. 그게 신표현주의와 옛 표현주의의 차이점이었다.
장 미쉘 바스키아, 뉴욕 뉴욕 [롯데뮤지엄] |
장 미쉘 바스키아, 더 필드 넥스트 투 디 아더 로드 [롯데뮤지엄] |
바스키아의 '뉴욕 뉴욕'을 보면 시끄러운 뉴욕 전경이 떠오른다.
번잡한 뉴욕 거리, 그 안에서 투쟁의 아드레날린을 잔뜩 분출하는 사람 등이 명징하게 느껴진다. 투박한 왕관, 통통 튀는 문자에서 해방감도 체감할 수 있다. 언뜻 보면 뭘 묘사하는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화가가 뭘 표현하고 싶어하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바스키아의 '더 필드 넥스트 투 디 아더 로드'도 그냥 보면 어린애의 낙서처럼 다가온다. 뼈를 내보이는 인간이 탄탄한 덩치의 소를 끌고 가고 있다. 인간의 눈은 흐릿하다. 잿빛 공기에 둘러싸여 있다. 특정 부위가 돋보이는 소는 토끼 눈을 뜬 채 한 발 한 발 이끌리고 있다. 그림은 기괴하다. 이 기괴한 표현이 인간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는 걸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게 다일까?
바스키아가 열심히 쌓고 덧바른 흔적에서 그의 끝없는 고뇌도 인지할 수 있다. 숨은 뜻을 상상하게끔 계속 부추긴다. "당신 작품에는 분노가 잔뜩 담겨있소." 언젠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큐레이터인 헨리 겔트잘러가 바스키아에게 대고 말했다. "그런데, 그 안에선 유머도 느낄 수 있군." 나지막이 덧붙였다. 네 그림을 단편적으로도, 입체적으로도 볼 수 있는 점을 자신도 알고 있는지. 즉, 이런 특성까지 스스로 계산하고 의도한 일인지를 떠보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때 바스키아는 씩 웃으며 응수했다. "사람들은요. 엉덩방아를 찧었을 때 비로소 웃음을 터뜨리죠."
앤디 워홀과 장 미쉘 바스키아.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그 남자는 비범했다.
쫀쫀하게 굴다가도 곧 간도 빼줄 듯 행세했다. 나른한 목소리에 하는 말은 따끔했다. 가장 재밌는 건 따로 있었다. 종잡을 수 없는 행동거지였다. 그는 무슨 짓을 해도 화제였다. 바스키아는 그런 워홀과 손잡은 게 좋았다. 바스키아의 몸값은 워홀의 재력, 타고난 마케팅 감각을 타고 나날이 비싸졌다. 사실 바스키아도 워홀만큼 스타성이 있었다. 반항적인 흑인, 개성 있는 패션, 왕관과 해골 같은 트렌디한 상징 등 힙한 요소로 무장했다. 영어와 함께 프랑스어, 스페인어도 완벽하게 구사했다. 밴드를 꾸려 비밥(Bebob) 재즈를 선보일 만큼 음악에도 조예가 있었다. 바스키아의 자유분방함을 워홀이 세련되게 포장했다. 바스키아에게는 '검은 피카소', '미국의 반 고흐'라는 별명이 따라왔다.
장 미쉘 바스키아와 마돈나. |
이쯤 바스키아는 뜻밖의 여자친구도 사귀었다.
깊고 날카로운 눈매, 도톰한 입술이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바스키아는 전시회와 갤러리에 올 때 그녀와 동행하곤 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야?" 주변 사람들이 바스키아에게 물었다. "마돈나라고 부르세요. 그녀는 엄청나게 유명해질 겁니다." 바스키아와 마돈나의 연애는 짧았다. 3개월 정도였다. 훗날 팝의 여왕이 된 마돈나는 바스키아에 대해 "영감이 떠오르면 새벽 4시에도 벌떡 일어나 그림을 그리던 남자였다"고 회상한다.
[장 미쉘 바스키아 더 레이디언트 차일드 스틸컷] |
바스키아는 꿈을 이뤘다.
그는 유명해졌다. 그 대단한 워홀조차 뛰어넘을 기세였다. 많은 이가 바스키아의 그림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 이들 사이에선 흑인과 이민자 등 당시 예술 소외계층도 상당수 있었다. "흑인을 미술관에 데려오겠다"는 그의 꿈이 현실로 성큼 다가왔다. 바스키아는 1980년대 중반 들어선 한 해 140만 달러씩 벌었다. 일시금으로만 4만 달러 이상이 턱턱 찍혔다. 하지만 빛이 세질수록 그림자도 짙어졌다. 바스키아는 그래봤자 20대 초반이었다. 아직 어렸다. 여전히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바스키아에게 주문이 밀려왔다. 바스키아가 돈이 된다는 걸 아는 갤러리들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일주일에 그림을 9점씩 그릴 만큼 혹사했다.
장 미쉘 바스키아, King Zulu [schirn magazine] |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흑인으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이지요?"
바스키아는 면담이나 인터뷰 중 던져지는 말도 안 되는 질문들도 참았다. "어릴 적에 어머니와 왜 헤어졌나요?" "과거에 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는지요?" "백인을 보면 어떤 느낌인가요?" 등 몰상식한 폭력이 귓가를 툭툭 쳤다. 그 시절 바스키아는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속 자유의 여신이었다. 하지만 관군(官軍)의 총성은 멈추지 않았다. 거듭 진격해도 멈추지 않을 듯했다. 바스키아는 신이 아니었다. 공격은 아팠다. 상처 위에 상처가 덧났다. 이제 바스키아는 최고의 화가였다. 하지만 왕관은 너무나 무겁고 거칠었다. 바스키아는 서서히 피로와 우울의 늪에 빠졌다. 그늘진 방구석에 앉은 바스키아의 눈에 초점은 없었다. 그는 두 손으로 바닥을 휘적였다. 무언가를 둔탁하게 훅 집고는 코에 댔다. 마약이었다.
앤디 워홀과 장 미쉘 바스키아의 작업 모습.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장 미쉘 바스키아·앤디 워홀, 무제, 두 마리의 개(Untitled, Two dogs) [롯데뮤지엄] |
휘청이는 바스키아에게 결정타를 날린 건 워홀과의 전시였다.
1985년, MoMA는 워홀과 바스키아의 공동 전시회를 열었다. 예술계에서 가장 핫한 두 사람의 합작품 16점을 볼 수 있었다. 당연히 화제였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하지만 평가는 가혹했다. "워홀의 특징도, 바스키아의 특징도 볼 수 없는 전시였다"는 식의 악평 천지였다. 바스키아는 당황했다. "워홀이 바스키아를 이용하고 있다", "워홀과 바스키아는 남몰래 연애를 하고 있다"는 식의 말에 분노했다. "워홀이 바스키아를 반려동물처럼 생각한다더라"는 소문에는 참담함도 밀려왔다. 워홀과 바스키아는 교류를 끊었다. 바스키아는 흰 머리의 키다리 아저씨도 잃었다. 표류하는 배에서 돛마저 사라진 격이었다.
장 미쉘 바스키아, portrait of Andy Warhol as a banana [Dazed] |
그렇게 허무하게 갈 줄은 몰랐다.
1987년, 워홀이 죽었다. 담낭 질환으로 수술대에 오른 워홀은 직후 친구들과 전화 통화를 했다. 간호사와 농담도 했다. 워홀은 금방이라도 퇴원할 듯했다. 그는 다음 날 심장마비로 눈을 감았다.
장 미쉘 바스키아, 묘비 [pinterest] |
바스키아는 워홀의 사망 소식을 듣고 무너졌다.
그는 깨달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새 워홀을 아버지처럼 여기고 있었다. 치고받고 싸운 진짜 회계사 아버지보다도 더 기대고 있었다. 마무리가 좋지만은 않았지만, 그따위 해프닝으로는 흔들 수 없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바스키아는 워홀의 투덜대는 말투가 그리웠다. 구시렁거리며 불평하는 목소리가 가슴에서 울렸다. 바스키아는 워홀이 죽은 그 해 작품 '묘비'를 만들었다. 저승 문을 열기 전 자기가 그린 꽃과 십자가를 한 번만 더 보고 가라는 뜻일까. 다음 세계로 가는 문턱을 넘기 전 '이건 바스키아다!'라고 느낄 수 있는 선과 색을 만지고 가라는 의미일까. 바스키아가 1리터의 눈물 이상을 쏟으며 그리고 칠했다는 점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바스키아는 완전히 붕괴됐다. 그는 마약에 몸을 내맡겼다. 약에 취할수록 그림은 더 난해해졌다. 찾는 사람이 줄었다. 소속 갤러리, 진지하게 만나던 여자친구도 다 잃었다. "바스키아는 이제 끝장났다." 이런 말이 나돌았다.
장 미쉘 바스키아, 죽음을 타고 [Singulart Magazine] |
1년 후인 1988년, 바스키아는 새로운 작품을 내놓았다.
바스키아일 게 분명한 이가 앙상한 해골에 올라탔다. 네 발의 해골은 X자 눈으로 그림 밖을 무심하게 보고 있다. 해골이 가는 곳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새로운 부활을 위한 요람, 아니면 영원한 죽음을 위한 무덤…. 배경의 금색은 경건한 종교화 같은 느낌도 안겨준다. 제목은 '죽음을 타고'였다. 바스키아는 허무하게 잃은 옛 영광을 찾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미국 곳곳을 여행하며 마약을 끊으려고 했다. 초심을 찾기 위해 아프리카행 비행기표도 예약했다. 하지만 해골이 향한 곳은 결국 무덤이었다.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기는 어려웠다. 바스키아는 그 해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약물 중독이었다. 겨우 27살이었다. 지난 8년간 남긴 작품 수는 3000여점이었다. "나는 한낱 인간이 아니다. 전설이다." 바스키아는 그 말처럼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정점도 찍었고, 바닥 아래 지하실도 경험했다. 그 사이 그라피티가 고개를 들었다. 신표현주의가 꽃을 피웠다. 무엇보다 소수자들 또한 예술의 한 줄기를 쥘 수 있었다.
장 미쉘 바스키아, Sugar Ray Robinson [pinterest] |
장 미쉘 바스키아, 무제 [브루클린뮤지엄] |
세상도 그를 인정했다.
바스키아의 그림 '무제'는 지난 2017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억1050만 달러(당시 약 1246억원)에 팔렸다. 당시 워홀의 최고가를 뛰어넘는, 미국 작가 작품으로 신기록을 세웠다. 자유를 갈망한 바스키아의 혼은 후대 예술가들이 이어받고 있다. 이제는 사무치게 아픈 그 말, 세이모를 다시 외치면서.
〈참고 자료〉
바스키아, 파올로 파리시, 미메시스
널 위한 문화예술, 널 위한 문화예술 편집부, 웨일북
〈후암동 미술관 현대미술 편 읽는 순서〉
1)“나체女에 웬 아프리카 가면?” 얼빠졌다 조롱당한 그의 ‘반전’[후암동 미술관-파블로 피카소 편] - 희대의 반항아 (2023. 5. 20.)
2)“흑인의 삶 어때?” 무례한 공격들…마돈나도 반한 27살男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장 미쉘 바스키아 편] - 자유의 반군 (2023. 5. 27.)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관상가 양반 아니었어?” 조선의 ‘얼굴’, 몰랐던 사실[후암동 미술관-윤두서 편] - 사실주의 특별 편 (2022. 11. 19.)
11)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2)“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3)‘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4)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5)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6)‘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7)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8)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스파게티 면발? 1315억에 팔린 그림, 충격적 이유[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액션페인팅 선구자 (2022. 10. 29.)
23)몸 좋은 보디빌더, 거대 막대사탕 들고 ‘의문의 포즈’[후암동 미술관-리처드 해밀턴 편] - 팝아트 선구자 (2022.11.12.)
24)“동양서 ‘테러리스트’가 왔다” 피아노 다 때려부쉈다[후암동 미술관-백남준 편] - 비디오 아트 선구자 (2022.11.26.)
〈후암동 미술관 인물 편 읽는 순서〉
1)“이런 나체화는 뒷골목에 내걸어!” 꼬장한 천재 모욕한 자 최후는[후암동 미술관-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편] - 신의 예술가 (2023. 4. 7.)
2)“12살 어린 빵집女와 몰래 연애를?” 소름돋은 목격자, ‘증거인멸’해줬다[후암동 미술관-라파엘로 산치오 편] - 모든 화가의 왕자 (2023. 4. 15.)
3)“성폭행 피해자는 나야!” 고문도 견딘 그녀…복수는 우아했다[후암동 미술관-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편] - 영원한 복수자 (2023. 1. 28.)
4)“예쁜 내 금발 공주님”…‘딸바보’ 국왕 눈에선 꿀이 뚝뚝[후암동 미술관-디에고 벨라스케스 편] - 고결한 관찰자 (2023. 2. 24.)
5)“아내·자식·명예 다 잃었다”…그런데 왜 ‘빵’ 터지셨어요[후암동 미술관-렘브란트 편] - 빛의 마술사 (2023. 1. 7.)
6)‘이 그림’ 때문에 화형당할뻔…어느 야심가의 기구한 삶[후암동 미술관-프란시스코 고야 편] - 흑화한 사상가 (2023. 2. 4.)
7)“날 잊지마오” 가시덤불 ‘감옥’ 8년 갇혔다…그림에 펑펑 울었다[후암동 미술관-추사 김정희 편] - 조선의 품격 (2023. 3. 11.)
8)“6년 약혼女두고 바람…죽자 묘지까지 파헤쳤다” 이 남자, 변명 들어보니[후암동 미술관-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편] - 위험한 사랑꾼 (2023. 3. 18.)
9)“죄송해요, 엄마가 너무 싫어요” 효자 아니었어?…이 화가의 ‘반전’[후암동 미술관-제임스 휘슬러 편] - 모던한 이방인 (2023. 3. 4.)
10)“14살 소녀 이따위로 만들었어?” 평생 먹을 욕 다 먹었다[후암동 미술관-에드가 드가 편] - 무희의 화가 (2023. 3. 25.)
11)‘미녀 그리기’에 진심이었던 이 화가, 진짜 이유[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편] - 행복을 그린 화가 (2022. 12. 24.)
12)“고갱 그놈, 도대체 왜 그래?” 악마인지 ‘악마의 재능’인지[후암동 미술관-폴 고갱 편] - 고귀한 야만인 (2022. 12. 3.)
13)“나랑 6년 계약해” 유명 女배우의 파격제안…인생 달라졌다[후암동 미술관-알폰스 무하 편] -체코의 긍지 (2023. 2. 18.)
14)“백번은 넘게 봤겠다” 모두 아는 ‘이 절규’의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에드바르 뭉크 편] - 노르웨이의 현자 (2022. 12. 31.)
15)“이놈의 짧은 다리 때문에” 카바레 스타의 영광과 몰락[후암동 미술관-툴루즈 로트레크 편] - 작은 거인 (2022. 12. 17.)
16)“로댕 아이를 뱄다” 폭탄선언 여성, 30년 수용소에 갇혔다[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 천재와 맞선 천재 (2022. 11. 5.)
17)눈동자 없는 기괴한 여자 그림, 알고 보니[후암동 미술관-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편] - 파리의 귀공자 (2022. 12. 10.)
18)숨참고 키스 다이브!…아내가 그렇게 좋으셨어요[후암동 미술관-마르크 샤갈 편] - 순수한 방랑자 (2023. 2. 11.)
19)“당신은 저질 누드화가야!” 격분한 판사, 면전서 그림 불태웠다[후암동 미술관-에곤 실레 편] - 영원한 아이 (2023. 4. 1.)
20)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진짜’ 괴짜 (2022. 9. 3.)
21)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피·마 대전 (2022. 9. 10.)
22)3번 유산·35번 수술의 악몽…그럼에도, 인생이여 만세[후암동 미술관-프리다 칼로 편] - 고통의 여왕 (2023. 1. 14.)
23)“내 천사여” 편지 사방팔방에 ‘뽀뽀’…한 무연고자의 죽음[후암동 미술관-이중섭 편] - 아고리, 나의 아고리 (2023. 1. 21.)
24)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우아한 전사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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