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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고미술’ 만난 파티의 시간…낯선 무대 된 호암미술관 [요즘 전시]
몸값 비싼 작가 니콜라스 파티
호암미술관서 한국 첫 개인전
리움 소장 고미술품과 교차
니콜라스 파티, ‘사슴이 있는 초상’(2024). [호암미술관]
리움 소장품 ‘십장생도 10곡병’에 그려진 사슴들(부분 확대). [리움미술관]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강렬한 색감과 파스텔 특유의 부드러운 질감이 묻어나는 몽환적인 느낌의 초상이다. 인물의 눈동자는 텅 비었다. 당장이라도 튀어나와 약동할 것만 같은 사슴만이 빈껍데기 같은 그의 형상을 에워쌌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사슴, 리움미술관이 소장한 조선시대 ‘십장생도 10곡병’ 화폭에서 만날 수 있는 영험한 존재다. 그렇게 장생과 불멸의 염원을 담아내는 상서로운 동물을 만난 동시대 현대미술이 무한의 공간으로 관람객을 안내한다.

“전시 기획 초기부터 한국의 예술품을 포함하는 것을 핵심으로 뒀습니다. 지난해 리움미술관에 와서 수장고에 있는 소장품 일부를 살펴볼 수 있었어요. 미술관 측과 상의하면서 고미술 컬렉션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고요.”

니콜라스 파티가 파스텔로 그린 대형 벽화 ‘폭포’ 앞에 서 있는 모습. [호암미술관]

‘파스텔의 마법사’로 불리는 몸값 비싼 스위스 작가 니콜라스 파티(44)의 예술세계가 깊어졌다. 지난 31일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개막한 ‘더스트’(dust·먼지)는 그의 국내 첫 개인전으로 동서고금의 문화적 상징을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엮여낸 전시다. 지난해 대대적으로 재개관한 호암미술관이 고미술이 아닌 현대미술을 선택한 첫 기획전이기도 하다. 파티가 6주간 용인에 머물며 전시장 벽면에 파스텔로 그린 벽화 5점과 신작 회화 20점 등 총 73점을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작가가 ‘십장생도 10곡병’을 비롯해 ‘청자 주자’, ‘백자 태호’, ‘군선도’, ‘청동운룡문 운판’ 등 한국의 국보·보물급 고미술품을 회화에 녹이거나 전시장에 병치시켜 작업을 기획한 점이 의미를 더했다. 가루가 날리며 공기 중으로 쉽게 흩어지는 파스텔의 연약한 특성이 오랜 역사가 깃든 고미술품을 만나면서 인간과 비인간, 문명과 자연의 지속과 소멸에 대한 사유를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니콜라스 파티, ‘청자가 있는 초상’(2024). [호암미술관]
니콜라스 파티가 파스텔로 그린 대형 벽화 ‘동굴’ 앞에 배치된 조선 왕실의 탯줄을 보관했던 ‘백자 태호’. [호암미술관]
니콜라스 파티가 파스텔로 그린 대형 벽화 ‘나무 기둥’ 앞에 그의 ‘버섯이 있는 초상’(2019)이 걸려 있는 모습. [호암미술관]
니콜라스 파티가 파스텔로 그린 대형 벽화 ‘산’ 앞에 전시된 용머리를 한 고려시대 ‘금동 보당’. [호암미술관]

예컨대 예술의 기원과 창조를 담은 벽화 ‘동굴’ 앞에 조선시대 왕손의 탯줄을 보관했던 ‘백자 태호’가 놓였다. 1여년 전부터 그리기 시작한 지구상 멸종된 종인 ‘공룡’ 연작 너머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상상의 용이 있는 ‘청동운룡문 운판’이 내걸렸다. 불로장생을 이룬 도교의 신선들이 담긴 김홍도의 ‘군선도’ 화면 끄트머리 앉은 개는 초상화 속 인물의 머리카락이 됐다. 중세 건축인 회랑 공간에서 아치문을 통과할 때마다 만나는 낯선 무대다.

그래서일까. 전시를 보고 있노라면 질문은 무한히 확장된다. 예술은 영원히 계속되는 가치를 추구해야 할까, 아니면 순간적인 아름다움이나 감정을 포착하는데 의미를 둬야 할까. 바라는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예술의 공허함은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 숨겨진 의미나 감정의 층위를 캔버스에 부러 드러내지 않은 파티의 의도적인 상징들이 관람객들에게 다채로운 시각을 제안할 뿐이다. 실제로 전시가 끝나면 그의 벽화도 사라지는데, 이는 파스텔 고유의 일시성을 극대화하는 장치다. 그는 “쉽사리 공기 속 먼지가 될 수 있는 예술작품에는 시적인 면이 있다”고 했다.

니콜라스 파티, ‘두 마리 개가 있는 초상’(2024). [호암미술관]
리움 소장품 김홍도의 ‘군선도’에 그려진 앉은 개(부분 확대). [리움미술관]

스위스의 작은 마을인 빌레트에서 자란 파티는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추후 영화과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그래픽 디자인부로 전과했다. 그가 지금까지 쓰는 유일한 재료인 파스텔을 처음으로 쓴 해는 2013년이다. 파블로 피카소가 파스텔로 그린 여인 초상화를 보고 충격을 받은 작가는 다음날 파스텔을 구입했다. 다만 그는 “피카소의 작품을 보고 파스텔을 사용한 건 사실이지만, 18세기에 파스텔 트렌드를 시작한 로살바 카리에라에 대해 더 깊이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며 “피카소는 파스텔을 많이 사용하진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파스텔은 18세기 여성들이 많이 사용했는데, 그 때문에 취미로 그리는 매체 정도로만 평가를 받았다”라며 “파스텔로 벽화를 그리는 몇 주 동안 나는 안료 구름 속에서 춤을 추는데 그건 정말 멋진 기분”이라고 말했다.

파티는 미술시장에서 작품 값만 수십억원에 달하는 스타 작가다. 지난 2022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대형 풍경화가 88억원에 이르는 최고가를 기록했을 정도다. 다만 지난해 가을 이후 고가의 작품 판매가 다소 주춤해진 모습이다. 지난 3월 아트바젤 홍콩에 참가한 하우저앤워스는 ‘Portrait with Beetles’(2019, 13억원)을 내놨지만 주인은 찾지 못했다. 지난 5월 크리스티에서 진행된 21세기 미술품 이브닝 경매에 출품된 ‘Grotto’(2019, 27억~41억원)는 철회됐고, 그로부터 2주 뒤에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Still Life with a Ribbon’(2011–12, 37억~48억원)은 판매되지 않았다.

전시는 내년 1월 19일까지. 관람료는 성인 기준 1만4000원.

니콜라스 파티가 파스텔로 대형 벽화 ‘구름’을 그리는 모습. [호암미술관]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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